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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by miel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특히 상담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다양한 직업과 계층을 만났고, 다양한 정치색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과 살아온 시간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신념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왔다. 아주 어렸을때 부터 가난이나 애정결핍의 조건속에서 살아와서 현실적이긴 했지만 타고난 성향의 이상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많은 시간 정신적 물질적 방황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10대, 20대에는 세상을 아주 많이 아는 것처럼 건방지고 오만했으며 들끓은 열정과 결핍으로 인한 분노가 인생을 휘둘렀고, 30대부터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성공하겠다는 열망으로 살았으며 그로인해 적당한 성공의 대열에 섰지만 결핍의 인격은 그것을 유지하지 못했다.


40대는 이상주의적 삶으로 모든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으며 신앙생활을 통하여 인생의 진리를 찾아 헤매이는 시간을 가졌다. 내면의 세계에 그리고 신의 세계에 대한 공부를 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무너진 현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수많은 눈물과 고난을 겪었다.


인생동안 나에겐 아무도 없었다. 결핍의 상태는 객관화를 갖지 못하게 하고, 타인은 감당할 수 없는 의존감으로 부담감을 느끼고는 멀어져 갔다.

50대가 되며 나는 지나온 날들을 분석할 수 잆는 객관화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수많은 시간을 통한 경험이 어느정도의 데이터를 만들어 내었고, 천둥벌거숭이 같던 성품이 고단한 인생속에서 깎이고 다듬어져 자기연민에서 나와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관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비롯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욕망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은 소수의 특별한 성직자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인간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할 뿐,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다. 타인의 행복을 위한 사랑도 본질적으로는 자기 만족의 내면의 기쁨이 들어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봉사나 기부도 이와 같은 마음이 내제되어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외로운 이유는 이러한 서로의 욕망이 부딪히게 되면 서로 타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점이 어떠한 인간관계이건 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에 대한 관계에 대한 환상과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물론 신은 인간을 공동체적 속성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혼자서 오랜 시간동안 살아 갈 수 없는 성향을 가진 존재다. 그러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계에 대한 적당한 거리를 형성하지 않으면 인생내내 멀어져서 고통스러워 가까워 지려 노력하고, 너무 가까워서 멀어지려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더이상 이런 소모전을 그만 두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인생의 화두를 관계가 아닌 나 자신으로 바꾼것이다.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인식하고 인정하고 이해하여 더이상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것에 대하여 어떠한 고민이나 노력을 필요이상으로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하였다.






이제는 자신의 성향이나 실력 그리고 인격에 대한 사색을 통하여 성찰과 발전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관계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며 신의 영역이다. 만남의 영역은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주어야 하는 전제가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며, 만남 자체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요즘 사기와 배신을 겪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문득 배신과 사기를 겪는 것은 인간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의 고통과 손해는 게의치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여기까지가 인문학적 관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물론 자신도 믿지 않는다. 인간 자체가 갖는 모순은 너무 많다. 그런데 인간은 도덕적이고 선한 것을 그리워 하고 그런 관계를 찾는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누군가를 찾고 만나고 실망하고 상처받고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선한 인간은 없다. 선은 한계가 없는 신에게만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 선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로망은 종교를 찾게 한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고 존경스러운지 알고 있는, 정신적인 수준의 향상을 원하는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한계가 없는 신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마 내가 50대에 안정이 되었던 이유는 이 질서를 인정했을 때라고 생각한다. 더이상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고, 인간은 원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치명적으로 상처나 고통을 받지 않으며,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세상은 인간의 생각하는 인식의 한계인 손익계산으로 질서가 형성되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세상은 긍정의 힘으로 질서가 형성되어 있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감정적이며 시공간의 한계를 지닌 자신이나 인간을 믿고, 의지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인생은 끝이없는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의 가장 큰 에너지는 긍정적이고, 주어진 현실을 겸손하게, 선하기 위해, 한계를 인식할 뿐, 옳고 그름의 기준없이 수용하고, 상황에 대한 올바른 대안을 세우는 것만이 인간의 역할 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삶을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향유하며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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