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이성

by miel





오늘도 하루 종일 감정을 관리하고 지냈다. 감정이 이성보다 너무 많은 성향이어서 자주 감정적이 되었던 나를 변화시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이 나오는 상황을 관찰하여 분석해서 그에 대한 이성적인 관점으로 바꿔주는 것을 하고 있다. 주로 감정이라 함은 부정적인 감정을 말한다. 짜증이 난다거나 기분이 나쁘다거나 걱정을 한다거나 화가 난다 거나 하는 이런 일련의 감정이다.


살면서 좋은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제만 해도 어떤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아주 잠깐의 기분 좋음과 감사를 계속 느끼긴 했지만 나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는 않았다.

좋은 일이 있더라도 순간의 기쁨을 아주 잠깐 느끼고는 다음일을 집중하는 나를 발견했다. 왜 나는 충분히 기뻐하지 않는가 그러니 삶이 늘 즐겁지 않지 않겠는가 이런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의 어떤 욕구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반응이다. 나는 기쁨을 계속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이라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감정이고 또한 상대도 행복하게 하는 감정이다.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표현해야 할 순간은 없지 않나 하고 생각을 한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너튜브에서도 티브이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부정적인 것이 좋다고 하는 곳은 없다. 내가 살면서 느낀 점 또한 부정적인 감정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경우는 없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모든 관계를 깨고 자신을 비하하며 또는 자신을 추켜세우며 늘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감정에 더 집중하고 신경을 쓰는 것은 주파수를 잘못 맞추고 있는 것과 같다.

부정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운을 주는 상황, 환경,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축복의 단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필요할 때는 단지 판단을 하는 기준에만 쓰이는 것 같다.

필요 없는 감정이 인간에게 있을 리가 없다는 전제로 부정적인 감정은 어디에 쓰이는 것이 맞는가를 생각해보니 표현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근거로써 필요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에게 보내는 위험신호이거나 권리를 지켜야 하는 순간에 작용되는 감정일 것이다.


또 하나는 정말 부정적으로 욕심이 만들어내는 정말로 필요 없는 감정인 것이다. 그러한 부정이 일어나면

<앗. 내가 잘못된 관점으로 생각하고 있네> 라고 판단하고 다시 관점을 바꾸어 인식하는 과정을 거치고, 상대가 부정적이어도 나는 부정적일 필요가 없으며 호응할 필요가 없다. 여전히 친절하고 따뜻하게 응대하면서 나의 자리로 돌아오면 될 일이다.






오히려 감정적인 순간은 가장 이성적이어야 하는 순간인 경우가 많다. 짜증이 날 때도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며, 걱정을 하다가도 이성적으로 그것이 걱정해서 해결될 일인지 아니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 판단해서 조절해야 한다. 화가 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이성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 어떤 순간보다 자신과 싸움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화가 일어난 나와 화를 이성적으로 다루려는 자신과 말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언제 어느 때 어떤 순간에도 필요 없는 것이었다. 내가 절대 선한 것도 아니며 상대가 절대 잘못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며 이 서로의 입장은 일치될 때도 있지만 일치되지 않을 때도 너무 많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개별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그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발전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브레인이 모여서 서로 다른 방법과 대안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성... 감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떠한가...

우울, 슬픔, 고통 이러한 감정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는 중간의 경계인 것 같다. 복잡하고 힘든 외부에서 오는 것들에 대해서, 내 마음 안에서 인내하는 반응이다. 자기 안에 발현되는 많은 감성은 생각이 성장으로 이끌어 성숙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기 성찰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하는 성장통이다.


우울한 것은 어느 선에서는 사색을 준다. 우울이 심해지면 부정적인 것이 되지만 적당한 우울은 사색을 깊게 하여 본질을 깨닫게 하며 통찰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슬픔은 어떤가... 슬픔은 눈물을 작용시키며, 고통을 통한 스트레스를 희석되게 하며 무엇인가 감정을 순환시키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퇴색되어가는 영혼을 맑게 해 준다. 이러한 감성의 발현은 예술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 감성은 내 마음 안에서 적당한 선의 작용에 의해서는 너무나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또한 그 선이 넘으면 부정적인 작용이 되어 많은 상황을 위험에 빠트리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을 컨트롤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선한 이성이 나를 움직이게 하기를 바란다.

때론 바보 같은 이성이라도 할 수도 있겠다. 바보 같은 이성은 감정이 아주 좋은 컨디션일 때, 사랑이 충만한 상태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자신이 가장 좋은 컨디션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다. 사랑이 충만할 수 있는 기도나 긍정적인 방향,대안,방법으로 나아갈 생각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이성적 분석을 해야 하는 순간 외에는 전부 긍정적인 관점으로 바꿀 것이다. 한마디로 좋게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서도 좋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나에 대해서도 좋은 관점으로 바라보며, 나의 미래는 잘 될 것이라 낙관하는 자세이다. 너무 긍정적인것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조금 들지만 그래서 바보같은 이성이라고 칭하겠다.


부정적이며 좋지 않은 감정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헤아리기 어렵다. 마음이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화가 나는 데 바보같이 따뜻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자신에게도 배려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것들은...


조금은 희생하기도 하고 손해 보기도 하고 위로해주고 다독여주며, 삶의 존립이 위험해지기 전까지는 바보 같은 이성으로 살아가기를 내게 바란다. 무조건 즐겁게 웃는 사람이고 싶으며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노력해도 나는 무조건 즐겁게 웃지는 않을 것이다. 삶이란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히히히.

그렇기 위해서는 나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바보같은 이성으로 살아가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