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실수
안산의 어느 커피숍, 어디쯤에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에 살고 있는 시동생을 만나러 갔다. 장남인 형보다 시동생이 먼저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아이도 먼저 낳았다. 그날은 동서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해주러 갔었던 거 같다. 오래전 일이라 뚜렷하지 않지만, 동서와 아이를 잠깐 만나고 밖으로 나와서 시동생과 커피숍에서 차 한잔을 하고 헤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결혼 전이었으니, 예비 시동생과 예비동서라고 해야 맞겠다. 그 후, 상견례를 마치고 결혼식을 하고, 순조롭게 진행된 결혼이었다. 결혼 후, 시댁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함께 산다고 해도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직장생활을 하느라 시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는 생활이 이어졌다.
먼저 결혼한 동서는 살림꾼이었다. 요리도 잘하고 육아도 야무지게 잘했다. 분가해 살면서 척척 잘 해냈고 마음도 착해서 동서갈등은 생기지 않았다. 반면에 나중에 결혼해서 시댁에서 함께 생활하는 나는, 맏며느리지만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직장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살림은 잼병이었다. 할 줄 아는 요리도 없었고 육아는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주부였지만 주부가 아닌, 어정쩡한 역할이었고 시어머니를 도와 심부름을 하는 정도가 다였다.
직장 생활하면서 어깨너머로나마 살림을 배우고자 애썼지만, 살림을 배우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어느 해 명절이었다. 안산에 살던 동서네 부부가 왔다. 물론 아이도 함께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명절을 준비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맏며느리는 명절 자체가 힘든 숙제였고 명절 음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곤혹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요리 잘하는 동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서가 음식 준비를 하고 나는 보조를 해야 했다. 체면이 서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이다. 착한 동서의 주도 아래 손발을 맞춰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달래 봐도 소용없고 엄마를 찾으며 칭얼대는 것이 심해졌다. 그때 좀 더 참았어야 했다. 칭얼대는 아이만큼 나도 예민해져 있었나 보다. 참지 못하고 아이 엉덩이에 손대고 말았다.
아이는 울고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아, 왜 그랬을까..
그때는 몰랐다. 동서의 아이를 혼내면 안 된다는 것을. 참았어야 했다. 달래든지 혼내든지 엄마가 하게 기다려야 했거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내 아이 동서 아이 할 것 없이 혼날 행동을 하면 누구라도 혼내도 되는 줄 알았다. 가족이니까. 내 자식을 내가 혼내는 것은 괜찮아도 남이 내 자식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말 한마디라도 뼈아픈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의 행동이 후회스러웠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멀어졌다. 내 아이가 자라고 혼내야 할 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때 동서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올랐다. 착한 동서였기에 망정이지, 명절에 싸움이 날 수도 있었으리라.
그 아이가 자라 장가갈 나이가 되었는데,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다. 세월이 흐르고 기억이 희미해져가고 있지만, 지금도 기억 속에 원망이 남아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이다. 너무 늦었지만,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땐 정말 큰 실수를 했다고. 미안하다고.
한순간 참지 못하고 욱한 마음에 저지른 실수가 평생 마음에 남을 줄 몰랐다. 상대의 입장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젊은 날의 철없고 무지했던 행동이 낳은 결과다. 처음에는 몰랐다 해도,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바로 사과하지 못한 것도 후회스럽다.
누구나 본인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행동하기 전에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다시는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했던 실수였다.
속상한 마음 잘 참아준 동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