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은 덤으로 얻게 된 시간이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는 도시로 나가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야간 고등학교를 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진학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현실이었으니까. 그렇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약속된 회사에서는 입학하기도 전에 겨울방학부터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어린 마음에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대에 찬 마음이기도 했었다. 돈 버는 일이 고생 시작이라는 것을 모른 체, 그저 신났던 기억도 난다.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동행이어서 낯설거나 두렵거나 소외된 기분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한 달 가까이 일을 했었던 거 같다.
어느 날, 퇴근길에 회사 앞에서 언니를 만났다. 서울에 있어야 할 언니를 부산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사실, 야간 고등학교를 간다는 사실을 언니에게는 비밀로 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 한다던 언니였기에 분명히 못 가게 할 것 같아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인데,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부산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퇴근길에 만난 언니 손에 이끌려 곧바로 서울로 와서 방학이 끝날 때까지 보내야 했다. 방학이 끝나는 시기에 맞추어 시골로 내려가 일반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던 철없던 동생은 그렇게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물론, 모든 학비는 언니가 부담해 주었고 덕분에 고향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 중 7명이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뭉쳐서 다니며 많은 것을 함께 경험하며 꿈을 키운 시간이기도 했다. 좀 유치하지만, 친구들의 모임을 2·9 클럽이라고 우리끼리 이름도 지었다. 아주 단순하게 2학년 9반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라고 학교를 보냈건만, 막상 학교에 가서는 친구들하고 놀기에 바빴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목표가 사라지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마음이 어우러져 마냥 신나게 놀았다. 생각도 고민도 비슷한 친구들, 너 나 할 것 없이 같은 고민으로 속상해하고 위로하고 같은 마음이 되어주었다.
보수적인 아버지가 불만이어서 반항이 심했던 친구가 삐뚤어지지 않게 서로 다잡아 주며 함께 했던 많은 시간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방과 후면 분식집을 했던 친구네 집에 모여서 푸짐한 간식을 먹으며 즐거웠던 일, 날마다 오는 딸의 친구들이 귀찮고 싫을 만도 한데 항상 웃으며 맞이해주고 먹성 좋은 우리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셨다.
동네 오빠를 좋아하던 친구는 늘 같이 놀다가 혼자 일찍 빠져나가 데이트를 하곤 했다. 그냥 풋사랑으로 끝날 줄 알았던 그 데이트는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으로 이어지고,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시집을 갔다. 예쁘장하게 생겼던 친구는 늘 남학생들이 쫓아다녀서 우리 모두가 그 친구를 지켜내느라 애써야 했고, 남자처럼 터프함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는 결혼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남자 앞에서 어찌나 내숭을 떨던지, 친구들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도 난다.
유머가 넘쳐 항상 익살스럽게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친구가 결혼해서 신랑한테 보여주는 다소곳한 모습을 보고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한 의외의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함께 보내며 좋았던 시간이었다. 보고 싶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
당찬 마음으로 야간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일하며 밤에 공부하는 일이 쉬웠을까? 눈앞에 펼쳐진 힘든 현실에 적응하느라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공부도 때가 있는 법, 언니의 현명한 판단으로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고, 그 후 못다 한 공부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꿈을 갖게 해 준 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