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초록색 물컵에서는 항상 소주 냄새가 났다.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맡아지는 김 빠진 소주 향, 맛이 궁금해서 몰래 빈 컵을 홀짝이기도 했다. 남아있는 한 방울로 맛을 느끼기에는 감질나서 입맛을 다셔야 했지만, 김 빠진 소주 향은 어린 시절의 달콤한 기억으로 남았다.
할머니는 소주를 좋아하셨다. 소주는 늘 가까이 있었고 식사 때마다 한잔씩 드시는 모습은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듯한 행복한 표정이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저렇게 행복한 표정이 될까? 소주 맛이 정말 궁금했었다.
그때부터 소주 사랑이 시작되었을까?
어린 시절 막연하게 시작된 소주 사랑을 맘껏 펼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몰래 홀짝이지 않아도 되고 마음껏 그 맛을 느껴봐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나이, 어른이 되었다. 직장 동료들과 보내는 퇴근 후 시간과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소주 사랑은 점점 더 커져갔다.
어린 시절 소주 맛을 궁금하게 만들었던 할머니의 행복해하시던 표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 소주를 마시며 나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그 표정을 떠올려본다.
많이 닮아 있을 거 같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할머니와 손녀딸, 그 모습을 상상하니 우습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 소주 사랑은 데이트를 하면서도 이어졌다. 직장동료와 친구들 대신, 남자 친구로 상대만 바뀌었을 뿐, 깊어지는 소주 사랑은 여전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은 데이트의 주 메뉴가 되어주었고 과한 사랑에 빠져도 허우적대지 않음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소주에 대한 사랑이 깊지 않았던 남자 친구는 때론 힘들게, 때론 기특하게 잘 배려해 주었고 데이트하는 내내 방해받지 않으며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때 깊었던 소주 사랑을 이해받지 못했다면 지금 다른 사람과 살고 있지 않을까? 사람사랑도 소주 사랑도 모두 지켜준 그 옛날 남자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진다.
한 번쯤 과한 소주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해봤어야 하거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깊었던 사랑도 희미해지고 다시 기약 없는 사랑으로 남았다. 남들 다 겪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소주, 그 사랑이 식지는 않았으나 만나기가 쉽지 않다. 가을이 깊어지는 이맘때쯤, 찬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허전함이 파고들 때면 소주 한잔이 최고인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많은 것이 변하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거 같았던 그 사랑,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힘들어하니 안타까움만 커진다. 소주 한잔으로 많은 것을 털어내고 이겨내며 위로받던 지난 시간들이었다.
술잔에 담긴 소주만 마셨을까, 가끔은 기쁨도 타서 마셨을 테고 희망을 담아 채워보지만, 못다 한 사랑의 아픔과 슬픔을 한입에 털어 넣기도 했겠지. 열정 가득했던 마음도 담고, 쓴맛 단맛을 버무려 그것이 인생이라고 외치기도 하면서. 소주 한잔에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담겨 있다고, 그래 그땐 그랬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