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사랑이 느껴지던 그때.
장거리연애 하던 그때 그 시절, 그는 항상 먼 거리를 차 타고 달려왔었다. 면허를 일찍 취득했다던 그는 운전 솜씨가 좋았다. 반면 나는 어릴 때부터 멀미가 심했고 무면허에 겁이 많았다. 그의 차에는 최신 가요가 흘러나오곤 했는데 세 번째 데이트하던 날 나에게 물었다. "어떤 노래 좋아해?" 난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말했다. "현아 노래 좋아해!"
난 아무도 몰라주는 현아팬이다. 그저 혼자 현아 노래를 즐겨 듣는다. 내가 팬으로서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게 있다면 인스타그램에 가입해서 현아를 팔로우한 것뿐이다. 그래서 알아주는 팬이 아닌 아무도 모르는 숨어있는 팬이다. 그는 내가 현아 노래 중에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했지만 나는 현아의 전 앨범 곡들을 모두 좋아한다. 그래서 무엇을 틀든 좋아하는 노래다.
우리는 그날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대화를 길게 나눴다. 그 뒤로 그의 차만 타면 현아 노래가 틀어져 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들려오는 현아 노래에 매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이면 사라질 행동일 줄 알았는데 연애하는 기간 내내 그의 차에서는 현아 노래만 흘러나왔다. 그는 내가 현아의 어떤 노래든 가사를 달달 외우고 따라 불러서 신기해했었다. 사실 현아 앨범 수록곡을 살펴보면 알려지지 않은 좋은 곡들이 많다.
별거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질려하지 않고 계속 함께 들어줄 사람이 생겼다는 게. 그동안은 친구의 차를 얻어 타도 좋아하는 노래를 물어봐준 이가 없었고, 남편을 만나기 전 만났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틀어놨었다. 만났던 사람에게는 간혹 이 노래를 틀어달라고 콕 집어 요청하기도 했지만, 타기 전부터 항상 현아 노래가 틀어져 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현아 노래만 나오는 차라니!
그 후 결혼하고 1년 남짓 여전히 현아 노래만 흘러나왔다. 내가 80~90년대 가요에 푹 빠지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도 옛 가요를 여전히 좋아했다. 요즘 노래는 아무리 들어도 가사가 외워지지 않지만 10대 시절 들었던 노래들 가사는 여전히 알고 있는 우리였다. 덕분에 차 타고 이동 중일 땐 같이 노래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현아가 앨범을 내게 되면 다시 현아 노래가 흘러나오는 차가 됐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함께 부를 수 있는 80~90년대 가요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멀미가 심했던 나는 그의 차에서 멀미를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끊임없이 좋아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데다가 나를 태우면 얼마나 조심조심 달리는지, 그의 차가 고급 세단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였다. 아마도 겁이 많은 나를 위해 무서워하지 말라고 살살 달렸으리라. 간혹 차를 오래 타야 할 때면 멀미하지 말라고 의자를 조금 눕혀주고 안마 기능을 켜줬다. 그리고 잠이 들 것 같으면 살며시 음악 소리를 줄이곤 했다. 내가 잠들면 더 빠르게 달리는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편안한 승차감이었다.
차만 타면 멀미와 싸우느라 고생한 기억이 많았는데 그와는 차 타고 이동하는 것이 꽤 즐거운 일이 됐었다. 30분만 타도 멀미 나던 내가 그를 만나고 2시간도 거뜬해졌으니 대단한 발전 아닌가. 이런 발전은 순전히 그의 다정함 덕분이었다.
얼마 전 그가 내게 "예전에는 빨리 달리면 무섭다고 했었는데 자꾸 타다 보니 이제 빠르게 안 느껴지지?" 하고 물었는데 옛 추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추억은 쌓이고,
현재도 추억이 되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