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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할머니 Aug 19. 2023

엄마와 오이

 "엄마 욤이 오이 세로로 길게 잘라주시고 치실 꼭 하라고 해주세요."
  "엄마 욤이 바삭바삭 좋아하니까 고기 바짝 구워주시고 양념 말고 기름장만 톡톡 찍어주세요. 상추 꼭 곁들여서요."
  "엄마 욤이 게임유튜브 못 보게 하시고 도서관 갔다 올 때 좋아하는 과자,  아시죠? 담백한 크래커 그거 사주세요."
 
  엄마, 엄마, 엄마 욤이가요, 욤이는요, 욤이에게요.
 
  다 큰  자식 주제에 아직도 엄마를 연발하며 어려서는 제 몸과 마음을 의탁하더니 지금은 제 자식까지 책임지라며 결혼하고 독립했다 다시 쳐들어온 자식과 손녀를 아무 말 없이 환영해 주신 나의 어머니여.
 

 아이를 낳으면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된다더니 그게 참말이었음을 하루에도 수 없이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생오이를 길게 잘라 씨부터 먹는 걸 제일 좋아하는 내 딸아이를 위해, 고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자주 손질을 해주시는데 어느 날 엄마가 얼굴을 찌푸린 채 일을 하고 계신 걸 봤다.
 
  "엄마 왜요? 손 베였어?" 하니
  "아니 나 오이 물 비린내, 고수 풀 비린내 싫어서."
 
  누워서 티브이나 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우면 마저 물었다.
 

 "뭐? 엄마가 싫어했어요? 그럼 엄마 수박도, 굴도 별로야? 오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싫어한다는데.
 아닌데 엄마 여름마다 수박 떨어뜨리지 않고 사주셨잖아요"
 
  "어머 오이 싫어하면 그렇다니? 맞아 수박도 굴도 영 별로지"
 
  딸아이 자다 눈썹 조금 찡그려도 깜짝 놀라 살피고 밥 먹다 입술 조금 움찔해도 알아채는 나인데 제 어미에 대해서는 40년 다 되도록 오이 싫어하시는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 너무 죄송하고 속상했다. 나이 들어 버린 엄마의 어깨를 한껏 끌어안고 엄마 냄새 맡으며 죄송하다 무심했다 말씀드리고 팠는데 마음만 있고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내 아이였다면 주저 없이 힘껏 안아주었을 텐데.
 
 수박 이야기 몇 마디 더 주고받고 할 일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믹스커피 한 모금에 일상의 고단함을 녹이고 있는 엄마에게 무심한 듯 질문하나를 했다.
 
  "엄마도 옛날에 갖고 싶던 이름 있었죠?"
 
  잠시 당황하던 엄마가 금세 빙긋 웃으며
  "수지, 미나, 안젤라 이런 이름 좋았어."
 
 안젤라의 삶을 꿈꿨던 나의 엄마. 공부 잘해 시골 마을 자랑이었던 멋진 딸, 아래로 줄줄이 어린 동생 위해 과감히 꿈을 변경한 용기 있던 맏누이. 결코 희생이 아니라 그저 잠시 멈추거나 길을 바꿨을 뿐이라던 현명한 여성.
 
 오늘도 묵묵히 나를, 내 딸아이를 위해 오이와 고수를 얼굴 찌푸린 채 썰어내어 주신 아침, 문득 감사로 차오른 눈물이 앞을 가려 이따 먹겠다며 퉁명스레 접시를 밀어내고 뒤돌았다.
 
 내가,  우리가, 아빠가 함께 하는 삶이 아닌 정말 엄마가 원했던 방향대로 갔다면 누구보다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았을 엄마의 주름진 손이 오늘은 더 안쓰럽고 그 마음만큼 사랑과 감사로 채워드리고 싶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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