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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예 May 20. 2022

피드를 훔치는 L

진저 캣의 일기

나는 드라이브 영상을 좋아해서 종종 인스타 피드에 올린다. 그래서 벚꽃이 한창 흐드러진 날에  이곳저곳 드라이브하면서 찍은 영상을 올렸었다. 그러자 어느 날, L의 인스타 피드에도 벚꽃 길 드라이브 영상이 올라왔다. 뭐, 꽃이 뽐내는 계절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엔 저녁마다 책방에서 함께 공부하는 아이와 먹은 도시락 사진을 일상 피드에 올렸다. 그러자 뜬금없이 L의 피드에도 아이를 위해 만든 도시락 사진이 올라왔다. 도시락을 싸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기에 뭔가 찜찜했다. 하지만 그건 뭐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금전적 피해나 저작권법에 걸리는 게 아니니 뭐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저 내 기분만 묘하게 찝찝할 뿐이었다. 나는 그의 무의식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저런 사람의 피드를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책에 대한 리뷰를 꾸준히 올리면서 인스타용 글치고는 좀 길게 쓰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L의 피드가 장문의 책 리뷰로 바뀐 걸 보고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오드리가 카페에서 분위기 있게 찍어준 내 사진을 몇 번 올렸는데 정말 기가 막힌 우연으로 며칠 뒤,  L의 피드에도 전문가가 찍어준 근사한 독사진들이 올라왔다. 그의 무의식은 어쩜 나와 이렇게 순차적으로 닮게 진행될까? 아니면 내가 쓸데없이 예민한 걸까? 

그 후에도 묘한 일치는 계속되었다. 내가 '나희도의 일기처럼'이라는 글을 올리자 그 후에  L도 드라마 스믈 다섯, 스믈 하나에 대한 얘기를 하며 나희도의 말을 차용하는 글을 썼다. 

나는 한 달 전부터 '플로깅'이라는 지구를 위해 쓰레기를 줍는 비영리 단체를 팔로우하고 있다. 플로깅이라는 말은 일반인들에겐 아직 낯선 단어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인스타에서 "지구를 위한 플로깅"이라는 피드 글을 봤을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서 결국 일상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불쾌한 기분 속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데 문득, 얼마 전에 우연히 읽은 L의 글이 떠올랐다. 열등의식과 질투심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의 중심을 잡기 위해 별로 유명하지 않고 자신과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을 살펴봤다는 문장이 왠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그 평가의 기준이 우스웠다.  사람을 유명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구분하다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자리에서 꿈을 찾아 버둥대는 가련한 인생들이지 않은가?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분류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존경하지도 않고, 평범하다고 해서 만만한 존재로 여기지도 않는다.  평범함 속에도 비범함이 있고, 화려한 인생에도 초라함과 쓸쓸함이 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나이이다. 그러니 L처럼 누군가의 생각과 취향을 참고해서 그럴싸하게 꾸며 올릴 이유가 없다. 특히 작가라면 자신이 되는 과정이 곧 작품으로 연결되기에 외부를 기웃거리느라 충혈된 눈알을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동안  L 때문에 인스타에 피드를 올릴 때마다 짜증이 났었다. 나는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그림의 과정을 보고, 일상의 소중함을 기억하기 위해 인스타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피드의 콘셉트를 참고할 만한 만만한 상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났다. 그동안 L이 나에게 소소하게 베풀었던 호의도 모두 염탐을 위한 가식으로 느껴졌다. 

L은 나보다 팔로워도 많고 신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소박하게, 때로는 꾸역꾸역 내 삶을 일구어가는 사람일 뿐인데 뭐가 그렇게 근사해 보였을까, 뭐가 그렇게 따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마도 L은 내 인스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스타도 멋져 보이면 그대로 따라할 거다. 가끔씩 전혀 그답지 않은 피드가 올라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면서 질투와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L은 가여운 사람이다.  

제발 L이 자신만의 피드를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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