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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예 May 22. 2022

주택살이

진저 캣의 일기

데크를  정리했다. 선물 받은 소나무가 끊임없이 뿌려대는 솔잎들을 치우고, 어설프지만 라일락 나무의 가지도 정리했다. 송진이 묻을까 봐 걱정이 돼서 상추와 토마토를 심은 방부목 화분도 끙끙 소리를 내며 옮겼다.

집 뒤의 데크를 정리한 뒤엔 집 앞으로 와서 디딤돌 사이사이에 박힌 솔잎들을 치웠다. 꽁꽁 감추어두었지만 아직도 펄떡이는 마음의 분노를 치우는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보란 듯이 지저분하게 자라고 있는 잡초를 뽑고 흙을 정리하면서 나는 속으로 딸에게 중얼거렸다.


'아빠가 이혼을 요구했을 땐 오빠가 고3이었어. 난 네가 고3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지. 그러나 모든 건 빠르게 진행되었고, 너희들 모르게 도장을 찍자마자 아빠는 당당하게 여자를 만들었어. 엄마는 모르는 척 아빠의 속옷을 빨고, 밥을 차렸어.

그건 좀비로 산 22년 중 가장 미칠 것 같은 시간이었어. 내가 무너지면 학폭을 겪고 어렵게 마음을 잡은 오빠가 방황할 것 같아서 아무 일 없는 척 평소처럼 살았어. 그런데 말이야, 그때의 분노는 탈출을 못하고, 이끼처럼 자라는 것 같아. 그래서 엄마는 아빠 얘기를 편안하게 할 수가 없어.

엄마는 종종 분노와 증오가 불처럼 일어났다가 슬프고 공허한 감정으로 바뀌는 걸 느껴. 무언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 뱉지 못하고 삼키는 기분, 입 안에 머금고 녹기를 기다리지만 내 혀가 타는 기분. 그러다 감정이 심장으로 숨어 들어가면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너에게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빠를 향한 엄마의 분노가 무턱대고 들끓는 게 아니라  풀 길 없이 억눌려왔던 거라고 설명하고 싶은데 못하겠어. 자식에게 이해를 바라는 게 무리인 것 같고, 이제 고3이 된 너에게 이런 얘기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내 가슴은 너무 답답해.'


머릿속에 가득한 말들은 흙속의 잡초이고, 시든 잎들과 쌓인 먼지였다. 나는 말들을 지워버리듯  집 앞 거리까지  비질을 하고, 물을 뿌려 먼지를 멀리 쫓아냈다.

옆 옆집은 이웃끼리 힘을 합쳐 파라솔을 설치하느라 아침부터 요란했다. 엄마들은 배달음식을 날랐고, 심심해 죽겠는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공을 주고받거나 개미를 관찰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풍경이었다.



주택에서 산다는 건 마음속의 희로애락을 들어다 보며 수행하는 일 같다. 쌓인 눈을 치우며 우직하게 봄을 기다리고, 라일락 향기에 취해 딸꾹거리다가 소나무가 뽐내는 존재감에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것, 이웃의 장미에 질투를 느끼고, 옆집의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며 안도하는 것, 그리고 오늘처럼 잡초를 뽑고 비질을 하면서 가슴 속에 고인 말을 털어내는 것,

계절마다 해야 하는 일이 숙제처럼 있는 주택에 살아서 다행이다.  숙제를 하다 보면 감정에서 깨어나고, 일상이 가슴 저릴 만큼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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