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저캣의 일기
그림책이 출판되기 전, 스케치나 가제본으로 만들어진 상태를 더미북이라고 부른다. 더미북을 만들 땐 장면 하나하나의 완성에 매달리면 안 된다. 대략 7,80퍼센트 정도만 완성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 전체적인 연결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손이 저절로 움직이듯 완성돼서 만족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데 다음날 보면, 그 장면은 다시 그리게 되는 일이 대부분이다. 도저히 안 풀려서 꾸역꾸역 그릴 때면 이걸 해결하고 넘어갈지, 일단 건너뛰고 다음을 진행해야 할지 누가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창작도 체력과 함께 멘탈을 붙잡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머리를 잡아 뜯으며 더미북을 만드는 중에 동료 작가의 출간 소식이 들려오면 갑자기 내 그림이 시시해 보이고,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지곤 한다. 나는 요즘 그런 감정의 휘청거림 속에서 스스로를 붙잡으며 작업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작업하는 시간을 평균 내 보니 하루에 네 시간도 안 된다는 사실에 화가 났었다. 내가 가진 적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작업도, 건강도, 감정도 일단 구석으로 치우고, 자녀의 건강과 입시와 마음 살피기가 우선시된다.
한동안 아이의 대학 입학 자소서를 함께 고치느라 바빴다. 글을 반복해 읽으며 전체적인 문맥을 부드럽게 하고 글자 수를 맞추다 보면 내 작업할 시간은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하루에 삼시 세 끼를 다르게 먹어야 하고, 어제와 오늘의 메뉴가 달라야 하는 밥상을 준비하는 일도 내 체력의 절반을 소진시키는 것 같다.
나도 안다. 두 아이를 양육하는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선 조금 이기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늘 그런 생각을 했고, 여전히 고민 중이며 늘 아이가 먼저인 선택을 한다. 자녀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내 꿈을 놓고 저울질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내일은 정말 인쇄소에 작업물을 맡겨야만 한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너희들 때문에 정작 나는 기회를 놓치고 살았어."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작업도, 인생도 낙천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기질이 낙천적이지 못한 나는 우울감에서 스스로를 건지기 위해 산책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헬스장을 가려고 애를 쓴다. 욕심을 줄이고, 사소한 일에 감사하며 눈앞의 하늘과 지금 그리는 그림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