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진저캣
“결혼은 생각 없지만 좋은 친구는 만나고 싶어요. ”
나의 말에 일 년 전 만난 일산의 타로사주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응 이뻐, 이쁘네. 이뻐. 이쁘니깐 51세 안에 생길 거야. “
5개월 전에 만난 도봉구의 용한 점쟁이도 이렇게 말했다.
“ 응, 이뻐. 언니 이쁘니깐 삼 년 안에 생길 거야. 근데 오래 지켜보고 사귀어야 해. “
(사실 점쟁이 외에는 이쁘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점을 보러 가고 싶어진다. )
1월에 한약을 지으러 갔을 때 사주를 보는 선생님도 나에게 말했다.
” 올해 누군가 생길 거야. “
“ 제 주변은 온통 여자들 뿐인데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 인연의 운에 들어와도 돌아다녀야 만들 수 있지. 그러니까 여기저기 다녀. “
그들이 좋은 친구가 생길 거라고 예언한 51세가 되었다.
그래서 4050 돌싱, 싱글, 여행이라는 모임에 가입했다. 채팅 창에 고루하고 따분한 글들만 올라와서 하품나 죽을 것 같지만 일단 꾹 참고 있다. 그들의 대화가 전혀 궁금하지 않고, 유머라고 퍼올리는 영상들은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고, 문장을 읽으면 잠이 쏟아진다. 나는 이 모임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는 글렀다는 생각만 든다. 그 모임에 함께 가입한 돌싱 지인에게라도 누군가 생겼으면 좋겠다.
띵!
단체 채팅방에서 명절에 같이 모이자는 글이 올라욌다. 역시나 모여서 술, 고기, 노래방이다. 여행이라는 키워드는 나중에 많은 친목이 이뤄져야 하는 건가 보다.
어쩜 나는 술, 고기, 노래방이라는 루틴이 따분한 건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채팅방의 따분한 문장들에 음성지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탈퇴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번 명절에도 아이들과 전라도 담양에 2박 3일 가기로 했다. 함께 여행을 가주는 아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아들이 아무 생각 없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의 여행 일정으로 친할아버지네 가기 위해 스케줄을 맞추는 게 어렵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순간 서운한 마음이 확 들었다.
대학교 시험장부터 알바 장소, 세종에 있는 학교와 기숙사까지 내가 바쁜 시간을 쪼개서 픽업&드롭을 해주고 이젠 군입대까지 나 혼자 따라갈 텐데...
“넌 엄마와의 여행을 일 순위로 두고 다른 스케줄을 생각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난 내 모든 일정을 다 옮기고 끙끙 앓아도 네 동생까지 챙기면서 너희를 일 순위로 두고 맞춰 살았는데 설마 명절 스케줄로 투덜대는 건 아니지? “라고 말할 뻔했다. 그 애는 그냥 생각 없이 한 말일 텐데.
자녀에게 서운해하면 안 된다.
자녀에게 바라면 안 된다.
나는 이혼 가정의 엄마로서 양쪽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아이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주문을 외우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내 마음이 갈라지며 우울한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명절에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는 건 싫은데 앞으로 어쩌지? 앞으로는 혼자 여행 다녀야 할까?‘
나는 부모도 형제도 배우자도 없는 사람인데 자녀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면 완전히 혼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나는 종종 정서적 풍요와 소통을 원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니면 누구에게서 얻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4050 모임처럼 따분한 사람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옆에 앉혀야 하는 걸까?
그럭저럭, 그나마 나은 누군가와 여행을 가고 밥을 먹으며 고독사를 면할 정도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가족을 챙기느라 바쁜 친구들은 잠에 곯아떨어졌고
나는 오늘도 달이 떠있는 생각의 강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건강한 어른은 떠날 수도 있고 혼자 남겨질 수도 있어야 한다. 또한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사랑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댈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어른은 자신이 사랑스럽고 가치 있으며 성실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자신은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이며 어떤 상황에 있든 늘 흔들리지 않을 자아 정체성이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자신을 무기력하고 나약한 사람이 아닌 자기 인생을 결정짓고 책임질 줄 아는 씩씩하고 능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p67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 김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