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스몰 토크

마지막 만찬처럼

소예일상

by 은채

집 뒤의 산책길을 지나

인공폭포가 있는 곳까지 가서 계단을 오르면

푸르름 속에 황톳빛을 띈 흙길이 나온다.

아카시아가 여름을 외치는 나무 아래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리막길을 따라 예전 내 책방이 있던 곳까지 걸었다.

책방 옆 카페 오랜에서 마시멜로가 들어간 초코라테를 마시며 사장님과 담소를 나눈 뒤

다시 집 뒤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왔다.

어느 집의 예쁜 대문을 찍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올해 안에 이 동네를 떠나게 될 것 같아. 그럼 더 좁고 낡은 집으로 이사가게 되겠지. 그럼 이곳의 평화로움과 다채로움을, 초록빛 여름과 하얀 겨울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이곳의 사람들은 이 아름다움을 누리며 잘 살아가겠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화려해 보이는 집 안에서 누군가는 지옥 같은 기분을 느끼거나 무료함으로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지도 몰라.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니까.

삶의 만족은 어느 곳에 사느냐보다 누구와 사느냐, 어떤 가치관으로 삶을 꾸리느냐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검소한 곳으로 옮기게 되겠지만 그곳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로 꽉 찬 공간이기도 할 거야.

나는 우울함과 공허함의 맛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열정적인 사람이기도 해. 그러니 이 평온한 주택가를 벗어나 성냥갑 같은 아파트로 들어가게 된다 해도 나는 새로운 곳에서 나답게, 힘차게 살아갈 거야.

그러니 미래를 향한 불안과 근심은 될수록 하지말자. 그때까지 이 주택의 삶을 마지막 만찬처럼 음미할 거야 . '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집 뒤에서 잡초를 뽑으니 어김없이 울어대는 우리 고양이.

빨리 들어와 함께 있자며 뾰로통한 얼굴을 하는 게 귀여웠다.


집에 와서 앱을 켜니 6560보가 찍혀 뿌듯했다.

진짜 오랜만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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