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스몰 토크

다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예일상

by 은채

3월.

아들이 입대를 했다. 그리고 딸은 서울에서 자취하며 과제에 치어 살았다. 결국 3층짜리 큰 집에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입대한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끝났지만 끝난 것 같지 않은 불안한 감정이 들었다. 욕심 많고 의욕적인 딸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은 가끔씩 무기력함과 짜증을 번갈아 느끼게 했다.

언젠가 다가올 나의 노년을 예행 연습한다는 체념과 우울, 쓸쓸함과 대출금이라는 현실적 압박이 가끔씩 시커먼 목구멍을 보이며 나를 삼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런 얘기들을 나눌 사람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울적했다. 나는 글을 쓸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다.

'아, 몰라, 미친 듯 바쁘게 지내다 보면 시간이 흘러가 있겠지.‘

다행히 불안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꽉 짜놓은 날들은 오래도록 생각에 잠길 틈을 주지 않았다. 1월부터 18개월 된 아기의 등원 도우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전 8시까지 가서 밥 먹이고 양치시키고 옷을 길아 입혀서 잠깐 책을 읽어주다가 내 차에 설치된 카시트에 태워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주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집에 오면 청소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잠깐의 집안일을 하거나 체력 충전을 위해 20분 정도 낮잠을 잤다. 오후 1시 30분부터 수업 준비를 하면 저녁까지 쭉 계속되었다. 토요일에도 오전부터 오후까지 두 개의 일러스트 수업을 했다. 그러고 나면 녹초가 되어 일요일 오후까지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어졌다.

그 와중에 틈틈이 책방 행사에도 참여했다.

헬스와 수요일마다 하는 취미연기 학원까지 다니며 틈틈이 지인들까지 만나느라 정말 바쁘고 정신없이 몇 달을 보냈다.

'이렇게 헉헉대며 사는 건 나답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동네를 산책했다. 잡생각을 할 수 없는 건 좋았지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만큼 피로한 건 영혼의 주소를 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취미 연기를 할 때엔 정말 신이 났고, 아이들의 얼굴에 기쁨이 피어오르는 걸 보면 내 입도 크게 벌어지고 웃음이 났다.

가끔씩 쇼가 끝난 뒤의 적막함처럼 고독이 찾아왔지만 나는 그 고독뿐 아니라 행복을 음미할 새도 없이 지쳐 곯아떨어졌다. 매일매일이 멈춤 없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헉헉헉 숨을 쉬며 달리다가도 잠깐씩 멈춰서길 반복했다. 꽃을 보고, 달을 보고, 고양이를 만지고, 내게 베풀어지는 다정한 마음들을 사진에 담았다.

6월.

느닷없이 집이 팔렸다. 드디어 팔렸다. 손해를 많이 봤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팔렸다!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하하하하하 이 놈아, 나는 서울로 간다. 너 혼자 여기서 고독하게 살아라! '

나는 애들 아빠를 발로 뻥 차는 상상을 하며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책방문을 닫으며 그동안 정들었던 아이들과 부모님들께는 정말 죄송했지만 서둘러 수업부터 종료했다. 수업이 남은 학생들에게는 전액 환불해 주었다. 그리고 5주 동안 주택의 짐을 혼자서 정리했다.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지인들과 마지막 식사도 했다. 자유의 몸이 된 후 5년 사이에 만난 이들은 내게 축복이었다. 모두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7월.

이사를 왔다. 60평이 넘는 주택에서 작고 작은 30평 아파트로.

또 혼자서 (공부하느라 바쁜 딸도 고양이 손만큼 도왔다.) 헉헉대며 세 가족의 짐을 정리했다. 분류하고, 버리고, 닦고, 파는 일은 이사를 와도 계속되었다. 덕분에 당근의 온도가 50도 넘게 올라갔다.

8월.

정리가 끝나자 번 아웃이 왔다. 올 1월부터 자신을 너무 굴렸나 보다. 나는 사색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너무 달렸나 보다. 어지럽고 숨이 차서 소파에 누워 있기 일쑤였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고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딸이 가자고 하는 전시회에 가고, 연남동과 성수동과 동네 카페를 찾아 다녔다. 우리들은 꼭 붙어 다녔다.


9월.

다행히 오래된 이 동네에는 높은 나무와 산, 개천과 공원이 있다. 그리고 40년지기 초등학교 친구들도 가까이에 있다. 그 모든 게 나를 회복시키고 있다.

다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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