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위 가릉빈가에서 이어진 상념
아침에 앞이 안보이게 눈보라가 휘몰아치기에
추운나라 러시아제 찻잔을 하나 꺼내 사용했다.
나름 오래된 브랜드라는데,
송이나 고려의 찻잔처럼 높은 받침도 재미있지만
가릉빈가인듯 아닌듯 모자쓴 인면조 그림이 눈길을 끌어 샀던 잔이다.
성스러운 조각이나 종교적 상징물 위가 아닌
찻잔 위에 그려진, 만화처럼 캐릭터화한 인면조 그림이 흥미를 일으켰달까.
진하게 드립커피를 내렸는데,
용량이 꽤 커서 서버의 커피가 모두 담긴다.
큰 찻잔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집에 데려왔던 건
흰 바탕의 큰 크기 덕분에, 검은 선으로 그려진 가릉빈가와 여러 문양이 시원스레 잘 보이기 때문.
가릉빈가는 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전래된 반인반수의 새인데
청정하고 미묘한 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여 불국토를 장엄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보니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했던 인면조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저게 뭐냐고 했던 헤프닝도 떠오른다.
위 사진처럼,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귀여운 가릉빈가,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며 불국토를 장엄하는 어여쁜 가릉빈가를 꽤 여럿 보아온터라
용이나 뱀마냥 목을 길게 늘인 그 기이한 형상에 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다.
지도만 보면 아시아이나,
스스로는 정색하며 아시아를 거부하고 유럽의 정체성을 자처하는 러시아에서
불교 경전 속 신수 가릉빈가를 캐릭터화하여 찻잔에 그려놓은 것을 보니
슬며시 웃음도 나오고.
아시아이기를 거부하는 러시아이나 결국은 아시아 혼종임을 드러내는,
가여운 오리엔탈리즘이랄까.
날도 추운데 눈이 휘몰아치기에 따끈하게 커피 한 잔 내려 마신다는게
러시아에 가릉빈가를 거쳐 오리엔탈리즘까지,
상념이 꼬리를 무는 겨울날이로구나.
2023.12.16
파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