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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 어떤 다기를 좋아하세요?

행남자기에 대한 소회

by 파벽

차를 마시다보면 어쩔 수 없이 용품에 관심이 가게 된다.

용품을 늘리고 싶지 않아 구매는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런 찻잔, 저런 다관 써보고 싶고

이런 도구, 저런 기물 사보고 싶고, 뭐 그런 시기가 한 번은 오는 듯.


애초에 나는 차를 떠받들며 마시지는 않는지라

다도(茶道)나 뭐 그런 형식을 즐기지 않는데,

예쁜 찻잔이나 다관의 심미적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살짝(?) 있다.

다구야 몇개만 있으면 충분한 거,

그거 살 돈으로 더 좋은 차 마시지, 했다가도

마음에 드는 찻잔, 다관을 보면 만지작거리게 되는게 참.


어떤 다구를 좋아하는가는 워낙에 개인 취향이지만

일상에서 깔끔하고 실용적인 것을 선호하는 나는

얇고 말끔하게 수분을 다 튕겨내는 본차이나를 한동안 꽤 즐겼었다.

실용성과 저렴함으로 무장한 유리다기도 예쁘고

도자기에 세월과 함께 찻물이 드는 것도 근사한 일이지만

가벼우면서 단단한 본차이나의 매력이 상당하단 말이지.


예쁘고 실용적인 유리다구


본차이나는 소성온도가 높아서 그런가, 가마 장비발을 타는지

대체로 대형 브랜드, 기업에서만 나오는 것같다.

한동안 도자기 대중화의 선두주자였던 행남자기나 한국도자기에서

줄기차게 본차이나를 뽑아 냈었고 질이 꽤 좋았던 기억이다.

아닌말로, 우리나라에 저 두 기업 그릇 하나도 없는 집이 있기는 한가 싶고.

이른바 민족기업으로 성장한 저 두 회사는

예엣날에야 외국 명품들 살짝씩 카피도 하고 그랬지만

2000년대 넘어오면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잡았던 것같다.

애초에 품질이야 외국 도자기 뺨칠 정도인데다

초저가 저렴이부터 백화점 명품라인 고렴이까지 다 있었으니까.

2005년에서 2010년 전후한 때에

여러 크리에이터들과 협업한 행남자기의 디자인 쇄신은 진짜 전율이 일 정도였는데,

지금 한국도자기가 그나마 건재한 것에 비하면 행남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느낌.


2007년 출시되었던 행남자기 플리세. 넘 이뻤는데 비싸서 많이 못삼...

(관련 기사 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4348222)


후계자 없는 장인들이 차차 나이를 먹거나 돌아가시고

행남자기가 회삿돈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공장을 죄 처분하면서

질좋고 값싼,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국산 본차이나를 구하는 건 이제 굉장히 한정적이 되어 버렸다.

행남자기 고가라인은 예전에는 돈이 없어 못샀다면

요즘은 구할수가 없어서 못사는 수집용 빈티지가 되어버렸다.

빈티지란 이름으로,

말도 안되는 저렴이 그릇이 더 말도 안되는 가격에 거래되는 현상도 보이고.


여튼 나도 몇몇 행남자기 그릇, 다기들이 있다.

엄마한테 물려받은 30-40년 된 것도 있고

내가 구입한 것도 있고, 뭐.

생각해보면 가격대비 품질이 월등한 실용적 소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옛날에 행남자기에서 나온 다관들의 큰 단점이

용량이 큰데 뚜껑이 얇고 고정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관을 기울이면 뚜껑이 바로 미끄러져 떨어져 버리는데

이게 다관의 기본형이 동일하기 때문에 고가라인이나 저가라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행남자기 분청라인 '고요' 다기. 뚜껑 고정이 안된다.


다관 용량이 있으니 여러 사람 둘러앉고

팽주가 얌전하게 두 손으로 다관을 잡고 따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나처럼 다관을 한 손으로 막 부리는 사람에게는 걸맞지 않아서

행남 다관을 꺼내 쓸때마다 뚜껑을 떨어뜨리기 일쑤.


저런 다관이 몇 개나 있는 탓에 고민하다,

문득 털실로 짜진 거북이 코스터가 눈에 띄었다.

섬유로 된 코스터는 찻물이 배어서 잘 안쓰던 차에

이렇게 저렇게 바느질을 좀 해서 다관 뚜껑을 잡고 있도록 개조~.

후루룩 대충 만든것 치곤 썩 마음에 든다.

기물에 있어 심미적 아름다움이 중요하지만

웃음과 해학도 못지 않게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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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실 코스터로 다관 껴안게 만들기. 거북이 뒷태도 귀엽죠? ㅎㅎ

잠시 쉬면서 차를 내리다가 다구로 생각이 옮겨가고

거의 망해보이는(?!) 행남자기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오고

저 행남 다관이 저렴한데 단단하고 실용적이지, 생각하다

맞아, 저 뚜껑, 그래서 내가 이 거북이를 개조했지,

거북아, 뚜껑 잘 잡고 있어라 낄낄거리다가

오후 찻자리에 대한 소회가 이토록 길어져 버렸다.



2025.03.19

파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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