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알리는 꽃으로 매화만한 게 있을까.
겨울이 채 가시기 전에 죽은 것 같던 마른 가지에서 향 높은 꽃을 터뜨리니
늦겨울 불어닥친 눈발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리는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중매(雪中梅)라는 이름이 더 고결할테지.
부담없이 막쓰는 용도의 다기를 몇 개씩 사두곤 하는데
한참 전 중고마켓에서 새것이지만 포장지가 낡은 행남자기 매화이야기 세트를 저렴하게 구매했었다.
문득 지금 찾아보니 2008년에 나온 다과세트라고 한다.
(뉴스 링크 : https://kr.aving.net/news/articleView.html?idxno=93232 )
행남자기에서 디자인 쇄신을 거듭하던 시기인데
그릇 바닥에 '筆muk, design+calligraphy'라고 쓰인 것을 보니
아마 이 무렵 행남자기에서 손글씨를 넣은 시리즈를 발매했었나보다.
직접 페인팅은 번거롭고 가격 상승 요인일 터라 전사지로 마무리한 듯 한데
손글씨였다면 진짜 좋겠다, 잠깐 생각해 봤다.
다관이 큰지라 잔도 4개나 6개면 더 좋았을테고.
물론 그랬다면 중고시장 저렴이로 나오지 않았겠지만.
매끈하게 빠진 기형에 깨끗한 흰색의 단단한 본차이나.
기본기에 충실한 야무진 다기이다.
다관과 잔, 다식 접시에 손글씨로 적힌 글을 이어 적어보면
다관,접시 : 세상일 잊어버리고 한가한 이 몸
잔 1 : 동쪽 집의 매화꽃 맑은 그 향기
잔 2 : 티끌 하나에도 물들지 않는.
이라 되어 있다.
출전을 찾아 보니
조선후기 여류문인 삼의당(三宜堂) 김씨의 시 동각매화(東閣梅花) 인 듯.
원문을 대충 새겨보면 아래와 같다.
世機忘却自閑身 : 세상일 잊어버려 절로 한가한 이 몸
匹馬西來再見春 : 한 필 말로 서쪽에서 와 다시 봄을 맞이하네
東閣梅花今又發 : 동각의 매화가 이제 또 피어나니
淸香不染一纖塵 : 맑은 향기엔 티끌 하나 물들지 않았구나
삼의당은 남원 출신 여인으로 같은 마을의 동년동일에 태어난 하립과 혼인했다고 한다.
친정이나 시댁이 모두 빈한한 잔반이어서 남편의 과거 급제가 소원이었다고 하나 결국 이루지는 못하였다.
시아버지와 시가의 다섯 형제가 모두 문인이었다는데,
며느리의 시를 함께 음미하고 인정해 주었다니
가세는 기울었어도 품격있고 열린 집안인 듯 하다.
행남자기가 전라도에 모태를 둔 기업이어서 남원 출신의 삼의당을 골랐으려나 싶기도 한데
적어 넣은 시구가 좀 아쉽다.
다관과 접시에 모두 첫 구절이 들어가 중복되고, 전체적으로 두 번째 행을 빼먹었다.
원래 다식 접시에는 두 번째 행이 들어갔어야 하지 않을까.
오래된 다기에 바라는 것도 많지, 싶다가
그래도 이때까진 도자기 만드는 저 기업 안에 풍류가 살아있었구나, 쓸데 없는 생각.
여튼, 썩 특별할 거 없이, 그저 수색이 잘 비쳐 좋은 실용적인 이 다기가
1년에 한 번 그림과 함께 활짝 피는 시기가 있으니
바로 매화차가 나는 이때이다.
올해는 매화가 약간 늦게 피어 차도 살짝 늦은감이 있는 듯 하다.
3월 중순, 마침 시간이 비어 잠깐 들른 세텍의 차.공예박람회에서
그 주 초에 따서 말렸다는 청매를 구했다.
남도는 때없이 몰아친 눈 덕에 요 며칠 설중매가 한창이라 했다.
화사한 향의 홍매도 좋지만 단정하고 은은한 청매야말로
가만히 새봄을 음미토록 하는 길잡이이다.
한동안 내게 봄을 선사할,
차가 된 봄, 매화.
매화차를 마셔야
봄을 맞는거지. 암요.
2025.03.27
파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