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날을 정한 그날. 무덤덤했고 우울했고 웃었다.
책상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새해 달력. 달력 구하기 힘든 요즘, 분식집에서 떡볶이 1인분을 사고 증정품으로 탁상 달력을 받았다. 그렇게 받은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드디어 5월. 주황색 형광펜을 들어 숫자 21에 원을 그렸다. D-day.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육 개월도 남지 않은 그날을 위해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죽을 날은 정했으니 어디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를 정해야 하는데... 내가 어디서 죽냐에 따라 어떻게 죽을지도 달라지지 않을까? 빨갛게 달아오르는 석양을 보며 바다에서 죽을 거라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뭐, 결론은 둘 다 물에 빠져 죽는 거겠지만 뭔가 다른 느낌의 죽음이랄까.
그렇다면 어디서 죽을지부터 정해야겠다. 어디서 죽지? 이왕 죽을 거 정말 멋진 곳에서 죽고 싶은데. 바다? 산? 국내? 해외? 안 가봐서 모르는 곳이 많긴 한데... 가보진 못했지만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는 에펠탑 야경이 보이는 곳? 영혼이 속죄받을 수 있다는 인도 갠지스강? 자살하면 지옥 간다니까... 속죄 받음 좋지. 근데 갠지스강은 화장된 후 뿌려져야 속죄받을 수 있는 건가? 애초에 힌두교가 아니면 의미 없는 거 아니야? 아놔. 죽을 곳 정하기 왜 이렇게 힘들어.
현재 통장엔 19만 원 있고 내년 1월에 8백만 원 적금 만기 되고 - 63만 원이지만 손해보고 팔면 백만 원은 챙길 수 있는 주식이 있으니 대략 9백만 원. 바로 가게 내놓는다 해도 안 팔릴 수도 있으니 그걸 고려하면 월세 빼고 7백만 원 정도. 생각보다 넉넉하진 않지만 죽을 곳 찾고 그 날까지 버티기엔 부족하진 않은 거 같네.
그리고 티브이를 켰다. 이 정도면 우울하면서 무덤덤한 고민을 충분히 한 거 같았다. 이제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었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로 가득한 예능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