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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파커 Dec 04. 2021

도쿄에선 연극을 보세요, 낡은 극장에 앉아서

시모기타자와(下北沢)와 연극 '분장실'    

* 글은 브런치북 <인생에 한번은 여자혼자 도쿄> 실린  매거진 <그녀들의 도쿄 리스트> 위해 재발행됐습니다.  


시모기타자와(下北沢)라는 동네를 알려 준 건 두 사람이다. 나보다 1년 먼저 도쿄에 와서 지내고 있던 친구 K(한국인)와, 도쿄에 와서 새로운 친구가 된 S(일본인)다.  (S는 나보다 스무살 쯤 연상인데, 우리 엄마보다는 어리니까 그냥 친구하기로 한다)


K는 구제 옷 쇼핑을 무척 좋아했다. 가끔 입고 나온 옷이 근사해 물어보면 "시모기타자와에서 샀어. 같이 한번 갈까?" 라고 했다. 가자, 가자 했는데 결국 둘이 함께 시모기타자와에 가진 못했다. K는 내가 도쿄에 짐을 풀고, 필요한 세간을 들이고, 조금씩 겨우 동네 지리를 익혀나갈 무렵(아마 석 달이 막 되어갈 무렵 같다), 도쿄를 훌쩍 떠나버렸다. 몇 개의 맛집 리스트와  "시모기타자와에 꼭 가봐. 분명 좋아할 거야"란 말을 남기고. 아, 기르던 화분도 하나 주고 갔지. "생각보다 외로울 거야"라며.


S는 공연 마니아다.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오래 했다. "50대부터 연극 하는 삶"을 모토로, 이른 은퇴 후 지금은 배우로 연극 무대에 선다. 가장 좋아하는 건 셰익스피어. 한국에도 흥미가 많아 자주 온다. 특히, 대학로라면 눈감고도 어디에 어느 극장이 있는지 찾을 수 있을 정도라고. "미미상, 도쿄에도 대학로 같은 곳이 있어. 일본 연극인들의 성지와 같은 곳이지." 시모기타자와였다.

시모기타자의 한 구제 숍의 쇼윈도. 한마디로 시모기타자와는 이런 이미지다.

K의 예언은 적중했다. K가 떠나고 생각보다 외로웠고. 과연, 나는 시모기타자와가 좋았다. 낡은 옷과, 낡은 극장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또 다른 시간으로 흐르는 곳. ‘빈티지’ ‘레트로’란 수식어를 동반하며, 켜켜이 쌓인 시간을 은근히 드러내는 곳. 음악, 연극, 영화, 패션 등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드는 곳. 복작거리지만 시부야(渋谷)처럼 공격적이지 않고, 다채롭지만 롯폰기(六本木)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동네 밖은 위험해!’를 시전하며 살던 내가, 도쿄에 사는 동안 동네(미나토구港区) 밖에서 가장 많이 찾은 ‘이바쇼’(居場所‐있는 곳, 거처)다.

시모기타자와 더 스즈나리에서 분장실을 처음 본 날. 더웠다...

S와 함께 연극을 봤다. 내가 처음 경험한 시모기타자와다. 소극장 ‘더 스즈나리(ザ鈴なり)’. 한국으로 치면 산울림소극장 같은 곳이다. 내로라 하는 일본의 연극 배우들은 모두 이곳을 거쳤다. 극장은 낡고, 좁고, 삐걱거렸다. 찌는 듯한 더위의 8월 초.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땀을 훔쳤다. 이날 공연은 일본 현대 희곡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清水邦夫‐올해 작고했다)의 대표작 '분장실(楽屋‐가쿠야)’이었고,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한 실력파 일본 극단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이 선보이는 무대였다.


‘분장실’은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배우 지망생이라면, 필수로 공부하는 유명한 연극인데, 배경은 제목처럼 공연 내내 ‘분장실’ 안이고, 출연자는 딱 여배우 네 명만 있으면 되기에, 언제 어디서나 공연이 가능한 단출한 구성이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란 말의 본질을 그대로 구현했다고나 할까. 고교 연극 동아리, 대학 연극과 등 프로,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일본 전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분장실 안에는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여배우 A, B, C, D가 있다.  A는 20대부터 40대가 될 때까지, 체호프의 ‘갈매기’의 주인공 ‘니나’ 역을 놓친 적 없는 배우다. B는 언젠가 무대에 오르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프롬프터(주인공의 대사를 읊어주는 사람)다. C는 ‘니나’역에 대한 꿈을 포기 못한 단역 배우. 그리고 (젊은) D는 (나이 든) A로부터 이제 ‘니나’역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A와 D가 옥신각신하고, B와 C가 티격태격하는 장면들 사이, 체호프의 ‘갈매기’와‘세자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등이 극 중 극으로 펼쳐진다. 왜 ‘분장실’이 연극인들에게 교과서가 됐는지, 연극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일본의 ‘국민 연극’이 됐는지 알 수 있다.

어느 날 찾아간 시모기타자와에선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어느 날의 내 마음 같은 그림..

무대 위와 무대 뒤에서 여배우가 품는 열망, 그리고 불현듯 찾아오는 절망에 대한 소회는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열망과 절망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세상은 내가 원하는 역할을 주지 않는다. 때로 그것이 온다 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분량은 아니다. A,B,C,D가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하나 부족하지 않을 텐데, 왜 무대는 그 마음에 비례해서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여배우 넷이 연극과 삶에 대한 회한을 풀어놓는 연극을, 연극의 메카라고 하는 시모기타자와에서, 배우들의 고향과도 같은 더 스즈나리에서 보는 건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연극 그 자체에 놓여있는 기분. 극장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향해, 시간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순서는 언제쯤 오냐고. 나는 분장실 밖을 나가, 무대 위에 오를 수 있긴 한 거냐고.

밤의 시모기타자와. 골목 골목 자꾸 새로운 풍경이 튀어나온다. 미로 같은 골목을 걷고 또 걸으면, 뭐라도 하나 깨우치지 않을까.


‘분장실’과의 강렬한 만남 이후, 나는 자주 시모기타자와에 갔다. S의 공연을 보러도 갔고, 후루기(古着‐구제 옷)를 사러도 갔고, 수프 카레를 먹으러도 갔고, 그냥 책 한 권 들고 무작정 가서 카페에 종일 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을 봤다. 다른 극단이 연출한 ‘분장실’을 두 번 더 봤지만, 질문은 멈추지 않았고,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도쿄에 왔으니, 도쿄를 살아보면 그만인데, 도쿄에 오면 뭐라도 될 줄 알았나. 또, 나는 뭐가 꼭 되어야만 하는가. 그때 나를 지배하던 불안을, 자꾸 솟아나던 불만의 근원을 지금도 가끔 돌이켜 생각한다. 이내 퉁 쳐 버리지만.  K, 네가 주고 간 화분이 너무 작아서 그래. 외로움의 크기가 식물의 키를 훌쩍 넘는다고.

헤이세이(平成)가 끝나고, 일본의 새로운 연호 '레이와(令和)'가 탄생한 2019년. 아베 전 총리의 벚꽃놀이 스캔들도 논란이 됐다. 이를 차용한 재밌는 상품들.

서울에 돌아와 또 ‘분장실’을 보았다. 배종옥·서이숙 씨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해 화제가 된 근작이다. 여배우가 아닌 남배우 넷이 등장하는 버전도 있었다. S에게 전하니 무척 안타까워 했다. 코로나만 아니면, 벌써 와서 보았을 거라고. 이상하다. 네 명의 배우들은 일본에서 본 공연 못지않게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는데, 한국 실정에 맞게 각색된 내용도 어색하지 않았는데, 질문이 사라진 ‘나’를 본다. 그렇다면 그 불안과 불만은 그 때, 그 순간이 이유란 말인가.


얼마 전 서울에서 K와 재회했다. 우린 도쿄에서의 (짧은) 추억을 주고받으며 메밀 국수를 먹었다. 나는 시모기타자와도, 연극도, 화분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마음으로 이 구절을 읊조렸다.


"흘러간 것은 마침내 그리워진다." (연극 ‘분장실’의 부제다.)


잘 놀다 왔다 도쿄에서. 잘 보고 왔다 시모기타자와를. 오래된 시간과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곳에서, 한 줌의 시간을 흘려 보냈다.


마침내, 그리워질.

흘러간 것은 마침내 그립다. 분장실은 내게 그것을 남겼다.


*시모기타자와: 도쿄 서북부, 세타가야구의 위치한 거리이름.  1970년대부터 젊은이들이 걷고싶어하는 거리, 살고 싶어하는 자유로운 예술의 동네가 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만들어진, 지금은 옛스러울 풍경과, 새롭게 개발된 상점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 '도쿄의 빈티지' '도쿄의 레트로' 로 불린다. 헌책방, 구제 옷가게, 복작거리는 이자카야와 야니키쿠집 등 화려하지는 않지만, 개성 강한 숍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매력적으로 여기는 동네다. 특히, 공연 마니아라면, 무조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곳. 한국의 대학로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일본 연극 마니아들이 몰려들어, 비슷한 열정을 뿜어내는 걸 느껴보는 것도 좋다. 시모기타자와는 1980년대 초반 일본의 국민 배우 혼다 가즈오가 '혼다 극장'을 오픈하면서부터는 '연극의 거리'로도 명성이 높다. 시어터711, 더 스즈나리 등 일본 연극인들에겐 메카이자 고향이 되는 극장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분장실' 같은 무대는 워낙 유명하고 내용이 잘 알려져 있으니, 일본어를 몰라도 한번 쯤 도전해 볼만 하다. 일본의 연극 예매 사이트 '피아' 를 이용해도 좋지만,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시모기타자와를 탐험하다가, 곳곳에 붙어있는 연극 포스터를 보고 찾아가, 남은 티켓을 사서 들어가는 것도 묘미다. 우연한 발견이, 더 충만한 기쁨이 되곤 한다.

대학로 풍경과  흡사해 더 반가웠다. 시모기타자와 극장들의 공연 정보 포스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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