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소설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집'
*이 글은 브런치북 <인생에 한번은 여자혼자 도쿄>에 실린 후 매거진 <그녀들의 도쿄 리스트>를 위해 재발행됐습니다.
하루키가 먼저였냐, 야구가 먼저였냐.라고 누군가 물으면(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냥 야구를 좋아하는(그리고 야구장에서 마시는 맥주를 사랑하는) 하루키가 어느 날 내 마음에 들어왔다. 정도로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다. (지금 나름대로 하루키 흉내를 내봤는데.. 흠..)
도쿄에서 꼭 하고 싶은 것 리스트 상단엔 진구구장(神宮球場) 야구 관람이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구구장이 홈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경기를 보면서, (결과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외야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는 일이었다.
스왈로즈는 하루키가 아주 오래, 충실하게 응원하는 팀이다. 그는 경기장에서 야구를 직접 보는 것, 즉 직관을 즐긴다. 텔레비전 중계는 어딘지 설렘이 부족하다고. 늘 진구구장 근처에 살아야 했다고 종종 고백한다.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야구팬이라면 공감할 이야기...
하루키의 말 때문은 아니었으나, 나의 도쿄 집(아.. 이렇게 부르니 거기 아직, 내 방이 기다리는 것만 같다)도 진구구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었고, 지하철은 한 번은 갈아타지만 넉넉하게 30분이면 도착했다. 서울에 살면서도 잠실구장(넵넵 두산 베어스 팬입니다)에 가던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하루키 팬이 아니었더라도, 사실 나는 진구구장에 갔을 거다. 뉴욕 여행 땐 양키스 스타디움에 가서 울었고(왜? 왜 울었을까. 구장이 너무 좋아서…?) 오사카에 가서는 교세라 돔(아, 여름에도 너무 쾌적했어…)과, 한신 고시엔 구장(기절할 정도로 더운 여름, 일본 고교야구를 봤다)에 갈 정도로, 이상하게 경기장 안에 ‘앉아있는’ 걸 사랑한다. 열기를 즐기는 건지, 열기를 살짝 식히는 시원한 맥주를 즐기는 건지. 도무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하루키가 말한 그 ‘설렘’ 때문일지도. (아 글씨, 가본 사람은 안다고요.)
여하튼, 나의 야구장 덕질 역사를 살짝 밝힌 건, 진구구장은 그중에서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하루키 덕(혹은 탓)에 다른 구장들에겐 없는 어떤 신성함이, 그리고 기대감 같은 게 있었다. 지금의 하루키를 있게 한, 그 결정적 순간이, 바로 이 야구장, 도쿄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하루키는 야구장에서 전업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78년 4월 도쿄(東京) 진구구장, 2회 말의 어느 순간. 그는 "하늘에서 뭔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다"(‘직업으로서의 소설가’)고 회고한다. 그 후에 쓴 소설로 ‘군조’ 신인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현현(顯現)’의 순간을 야구장이라는 공간에서 맞이하다니. 참으로 ‘하루키스럽다’.
하루키는 한신 칸(오사카(大阪)와 교토(京都) 사이를 일컫는 말) 출신인 자신이 도쿄팀을 응원하게 된 이유라든가 약체인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수십 년 간 응원하며 패배에 대한 관대함을 얻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에세이를 통해서 자주 밝혀왔다. 특히, 자전적 요소가 강한 짧은 소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소설집 ‘일인칭 단수’)은 그가 야구장에서 감각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풀어냈는데, 내겐 이 말이 하루키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전적으로 이쪽 생각이지만), 우리가 비슷한 '인류'라는 걸 일러주는, 결정적 증언처럼 들린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팀이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나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한히 사랑한다."
내게도 무언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주기를 기대하며,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길 바라며) 진구구장에서 경기를 본 건 2019년 4월이었다. 하루키가 진구구장에서 소설의 신내림(?) 같은 걸 받은 그 봄으로부터 41년이 흐른, 바로 그 자리에서. 도쿄 시리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경기. 하루키처럼 나도 스왈로즈를 응원했다. 결과는 9:0 완패.
그날 상대편 요미우리의 투수 야마구치 슌은 정말 잘 던졌고, 그 해 메이저리그에 진출, 류현진이 있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입단한다. (지금은 유턴해 다시 요미우리 소속이지만)
현현(epiphany·일상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통찰의 순간)은 끝내 없었으나, 맥주는 있었다. 하루키는 흑맥주를 파는지부터 둘러본다는데 나는 망설임 없이 ‘기린 이치방시보리’였다. 이날 구장에 다른 맥주 판매원도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왜냐하면,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냘픈 소녀들이 왼쪽 귀에 꽃을 꽂고, 자기 몸보다 더 큰 맥주 통을 등에 지고, 가파른 계단을 잽싸게 오르내리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서.다른 맥주의 기억은 없다.
맥주를 들이키며,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을 맞는다. 신 내림도 없었고, 경기도 졌지만 문득 이정도면 괜찮다 싶었다. 야구경기를 볼 줄 알아서, 하루키를 좋아해서, 도쿄에 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말을 알아서. 되뇌일 수 있어서.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 -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루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중에서)
그리고, ‘현현’을 기다리는, 아니 찾아 나서는 일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야구장은 계속 그 자리에, 나를 위한 외야를 비워두고 있을 거니까.
언젠가 진구구장에 가실 분들을 위해
*1926년에 지어진 야구장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해서 더 매력이 있다. 외관은 수수하지만, 수용인원이 3만 8000명(잠실구장은 2만 5000명)이나 되는 대형 구장이다.
*100년이 다 돼가는 이곳에선 일본 프로야구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경기뿐만 아니라, 여름이면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봄·가을엔 일본 6개 대학 야구 리그도 열린다. 그중 특히, 한국의 연고전(혹은 고연전)으로 불리는 소케이센(게이오대와 와세다대의 경기)은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 일반 관중까지 몰려 언제나 만원사례.
*지는 것에 익숙한 스왈로스 팬들은, 결과에 상관없이 8회가 되면 우산을 꺼내 응원한다. 활짝 펴도 관람에 방해가 안될 만큼 작고 귀엽다.
*아오야마잇초메(靑山一丁目)역이나 가이엔마에 역에 내려 도보로 5~10분.
*아오야마잇초메역 인근에선 가을에 은행나무 축제도 열린다. 아시아 최초의 쉑쉑버거 매장(가이엔 지점)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으면, 완연한 가을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 글은 2019년 3월~2020년 3월까지. 도쿄 생활을 바탕으로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