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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파커 Dec 12. 2021

당신에게 놀아나는 내 인생이 좋아요

이원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당신에게 놀아나는 내 인생이 좋아요. 당신으로 탕진하는 내 삶이 좋아요.”


이 문장을 만난 날 생각했다. 앞으로 사랑이 뭔지 고뇌하는 인간이 있다면, 이렇게 읊어줘야지 하고. 인생이 놀아나도 좋고, 삶을 탕진해도 좋은 것. 사랑엔 다양한 형태가 있고, 저마다 그 방식도 다르고, 그럴싸한 말들도 많지만, 역시 사랑은 이런 것 아니겠냐고. 이 정도 도량과 담력은 있어야지. 사랑이 점점 어렵다는데, 결국 그게 다 놀아나기 싫고, 탕진도 아까워서 그런 거니까.

이미지출처=픽사베이

이 말은 이원하 시인의 산문집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달)에 나오는, 고백이다. 이 시인은 지난해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사진)를 발표하고, 시작기(詩作記)와도 같은 산문집으로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어딘지 야릇한 제목의 시집엔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시 쓰기를 시작한 여자가 산다. 앞서 배포 큰(?) 그 고백의 주인공, 바로 시인이다. 제주에서 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가끔 울고, 자주 웃었다. 그 속에서 피어난 애틋한 사랑의 말들. 황인찬 시인은 이를 두고 “오직 사랑으로 추동되는 글쓰기”라 평했다.


나는 이 시인의 신작(그게 시든 산문이든)을 몹시 기다리고 있다. 눈 쌓인 섬도 살결 푸른 바다도 당신이 없어 아무 소용 없다던 시인이, 제주에 온 여행자들에게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던 시인이, 이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으리라는 확신에서다.


‘얼굴 하나를 그리워한 지 오래되어/하품이 나오지만 그래도/얼굴 하나가 진득이 그리워요’(‘투명한 외투를 걸쳤다면 할일을 했겠죠’) 아프고 쓸쓸한 시집이 사실은 귀엽고 발칙한 욕망을 곳곳에 심어놨다는 걸 (산문집을 통해)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러웠지만 눈 감을 수 없었어요. 눈 감으면 뽀뽀해야 하잖아요.”

“용기를 내어 그를 만져보는 순간순간이 있는데요. 그럴 때마다 그는 유난스럽게 화들짝 놀라곤 해요.”

“궁금하니 빠르게 사랑을 진행시켜야만 하겠는데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산문집에서 시인은 노트북에 그의 사진을 띄워놓고, 오래전에 사둔 반지를 들고, 연습한다고 했다. “두근거리다가 터지는 풍선이 되어 내가 먼저 고백하려고 해요” 라더니, 지금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다 한다. 그 고백은, 사랑의 행방은, 어떻게 됐을까.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내 심정은, 이제 추리소설을 읽다가 모든 걸 간파한 탐정이 범인을 지목하기 직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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