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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Jan 15. 2022

속내를 보여주는 용기

상대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법

얼마 전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한 날이 있다. 누가 그랬다고 하면 미쳤구나 했을 짓을 내가 하고 종일 멀미가 났다. 생전 이런 헛짓을 해봤나 싶은 실수에 자존심이 상했다. 아이를 데리고 휘리릭 하는 일에는 이런 실수도 있구나 싶다가도 나 스스로가 이해 안 가는 그런 날. 스스로 개미만큼 작아진 기분이었다. 내 머리가 맛이 갔나 싶고 자괴감 든다는 표현을 누군가에게 하고 털어내고 싶었는데 남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과 내 나름의 상처 난 자존감에 어디에도 속내를 털어내지 못했다. 한숨이 새어 나와도 이미 벌어진 일이고 내 할 일은 해야 하는 현실에 아이와 놀아주고 먹이며 하루가 저물었다. 매일 뻗기 일쑤인 내가 잠도 안 오는 지경이었다.


능동감시관리 대상이었던 아이를 데리고 해제 전 검사를 갔다. 보건소가 아니라 그런지 그나마 한산한 검사소에 짧은 줄을 서며 다행이다 싶었다. 아이의 얼굴엔 벌써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칭얼거리며 떼쓸 기미를 보이던 아이가 울먹이며 날 올려다본다.


"엄마, 나 울지 않고 검사받고 싶어요."

"그런데 막상 받으려니 눈물이 나는구나?"

"(끄덕끄덕)"


꽉 잡고서야 검사를 마친 아이가 남은 울음으로 훌쩍이는데 작은 손을 잡고 걷던 나도 눈물이 왈칵 나서 차로 가다 말고 멈춰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가 미안해."


내가 비록 코로나의 발원지는 아니나 검사를 받고 우는 아이에게 어쩐지 너무 미안했다. 원래 엄마는 그냥 엄마라서 죄인이라고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그래서 이리 미안한가?


속내를 보여주는 것은 그 안의 진심을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아이가 그냥 힘주어 떼를 썼다면 어차피 해야 하는 검사를 어찌하겠냐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울고 싶어 우는 게 아니라는 표현은 나를 한결 부드럽게 했다.


이 아이는 유독 속내를 그대로 얘기할 때가 많다. 유치원 운동회에서 상으로 뽀로로 물통을 받았지만 축구 갈 때는 캐릭터 없는 파란 써모스 물통만 쓴다고 하는 아이는 뽀로로가 너무 아기들 것 같을까 봐 집에서만 쓰겠다는 속내를 밝혔다. 다시 말해 집 밖에서는 체면 차리느라 그렇다는 진짜 사정을 엄마에게 알린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물통을 왜 집에서만 쓰냐고 물을 필요가 없어졌다.


함께 화에 대한 책을 읽다가 아이는 자기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우리 복복이는 언제 화가 나?"

"음, 형아가 나한테 화낼 때?"

"아, 속상하지 그거."

"아, 내가 뭐 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면..."

"엄마도 알 것 같아. 그림이든 만들기 그런 거 할 때 생각처럼 안 되면 화가 나?"

"(끄덕끄덕)"


빙긋 웃으며 형아 얘길 꺼내다 말고 심각한 얼굴로 털어놓은 두 번째 이야기. 말하면서도 마음이 가라앉는지 아이의 코가 빨개진다. 누가 날 화나게 했다는 이야기보다 스스로가 언제 진짜 화가 나는지 알고 있다는 게 기특했다. 평소 그림을 그리다가 그렁그렁해지거나 뭔가 시도하다가 멈춰 뒤 돌아앉는 걸 보며 나도 충분히 알고 있던 부분이었지만 이렇게 얘기할 기회가 반가웠다.


"엄마도 그래. 근데 복복이는 매일 자라고 있잖아. 우리 집에서 제일 막내지만 대신 앞으로 자라날 기회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많아. 손도 더 야물어지고 더 많은 것도 알게 될 거니까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정말 도움이 필요한 건 엄마가 도와줄게."


나라는 엄마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을 만치 최선을 다해 위로에 나섰다.


늘 진심에는 힘이 있다. 가려진 사연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가까운 이에게 건네는 속내는 가끔 큰 위로로 돌아온다. 나는 이 아이에게 파닉스 따위를 거대한 진리처럼 가르치고 있을지 몰라도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가르치는 나는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훨씬 작고 미숙하다.


아이는 오늘 아침에도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지난 검사 이후 등원을 재개하고 일주일 만에 또 확진자가 나와 전체 원생에 대한 선제 검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등원시키기도 싫었다가 등원을 안 해도 받으라는 안내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계속 생각하면 걱정되니까 차라리 아침에 빨리 해버리겠다며 선뜻 따라나서는 아이가 애잔했다. 비록 우리 아이는 면봉을 보자마자 뒤집어져 검사소의 테이블을 엎을 뻔했고 나는 사과봇이 되어 죄송하다 수고하셨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지만 지난번 검사 때 했던 아이의 말이 자꾸 떠올라 다정함으로 무장했다. 울지 않고 검사받고 싶다던 진심. 말하지 않아도 진심은 모르지 않지만, 진심을 말로 듣고 나면 이상하게 이해심도 인내심도 자라난다.


"엄마, 쉴 수 있을 줄 알았죠?"

"엄마 좀 쉬자, 응?"


물론 감동은 짧고 현실은 꼬리가 길다. 매일 지지고 볶는 기나긴 코로나의 겨울, 잠시 한숨 돌려보려는 나를 기어코 쉬게 두지 않겠다는 건데, 이런 말은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엄마를 놀려? 역시 내 인내심은 짧다. 킥킥 웃으며 나를 보는 두 아들에게 진심으로 쉬고 싶은 엄마의 속내는 아무리 크게 말해도 안 들리는 모양이다.


"엄마니까 엄마 거북이는 엄마 드세요."


인심 좋은 둘째는 늘 자기 것의 일부를 나눠준다. 이번에도 자기가 만든 고구마 쿠키 중 심혈을 기울인 엄마 거북이를 내준다. 그래, 먹을 거 나눠주는 건 찐 사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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