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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들의 사회

무의미한 말의 의미를 찾아서

by 미미

"우리는 거의 반대네?"

"자기랑 나랑 다 다른데 궁합은 좋대."


남편은 ENTP, 나는 INFJ다. 대학생 때 단체로 시험 보듯 MBTI를 본 적이 있는데 INFJ가 나왔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간이 테스트를 가끔 해보면 어김없이 INFJ가 나온다. 이건 뭐 십수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INFJ의 늪이다. 보통 선의의 옹호자라고 불리는 이 유형은 부인할 수 없이 나와 일치하는 기질들을 얘기한다. 내향적이라 많은 이들과의 교류보다 마음 맞는 소규모 만남을 선호하는 성향이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호불호도 강한 편이라고 한다. 무난하게 보여도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있어서는 사람 꽤나 가린다는 것. 게다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성향이 강해지는지 사회적 관계에 감정을 소모하는 게 한층 힘들어졌다. 어릴 때는 나이 들수록 굳어지는 어른들의 면면이 때로 꼬장꼬장함으로 보였다면, 막상 내가 마흔을 맞이하고 나니 그렇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면 이미 많은 삶의 이유들로 몸과 마음의 에너지 소모가 많아지는데 굳이 맞지 않는 사람과 용써볼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느낀다.


마흔이 되면서 동시에 초등학생 학부모가 되었다. 이사하자마자 맞이한 입학식 날, 운동장에 반별로 줄 서서 아이들의 하교를 기다리는데 세상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같은 반인데 앞뒤로 서서 아무 말 안 하기 어색하니 인사라도 할 생각에 앞의 엄마와 눈을 마주치려는데 시선을 쓱 피한다. 뒤에는 부부가 와서 둘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나도 모르게 별 내용 없는 그 대화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쳇, 좀 쓸쓸한데? 나도 남편한테 시간 내서 같이 오자고 할 걸 그랬다.


미국에서 한국행을 택하며 가장 크게 느꼈던 차이는 낯선 이와의 벽이다. 미국에서 첫째를 프리스쿨에 데려다주러 가는 시간은 어렸던 둘째의 낮잠시간이라 길지 않은 운전에도 매번 잠들어버렸다. 미국 엄마들은 그 상황을 보기만 하지 않고 말을 건네고 지나가거나 둘째를 잠깐 봐준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아장아장 걷는 첫째로 시작해 둘째가 뛰놀기까지 미국에서 육아를 하는 동안, 적어도 마주치면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 그 일상이 익숙했다. 비단 엄마들끼리만이 아니라 지나는 누군가와 나누는 가벼운 교감 말이다. 마트나 우체국에서 줄 서있다가도 아이 낮잠에 대한 수다를 나누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귀국해서 처음 집 앞 놀이터에 갔던 날, 첫째와 동갑으로 보이는 아이의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가 마주한 철벽에 당황스러웠던 일이 있다. 아이들과 동네를 오가는 내게 편히 말을 거는 것은 주로 어르신들이었다. 코로나도 터지기 전이었던 그때 느낀 벽에 난 살짝 조심스러워졌다. 마주치는 동네분들께 인사하면 크게 당황하며 인사하는 분들이 많았다. 내가 캐나다에서 한국 돌아와 처음에 겪었던 일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생각해보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눈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서로 인사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데 왜 그게 섭섭했을까?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지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중에도 낯선 이들과의 짧은 교감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아이들을 모시고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던 시절, 곳곳에서 마주친 이들과 나눈 별 의미 없는 대화가 날 치유해준 날들이 있었다. 땅만 보며 유모차를 밀던 내게 날씨가 좋다고 말을 건네는 이 덕분에 날씨가 좋다는 걸 깨달았던 적도 많고, 아이들과 수고한다는 한 마디의 말에 내 힘든 마음에 작은 에너지가 채워질 때도 있었다. 혹자는 겉으로 말만 좋게 할 뿐이지 개인주의가 팽배한 미국이라고도 하지만 가벼운 말이라고 무조건 무의미할까?


아이가 다리가 아파 갑자기 축구수업을 쉬게 되었는데 몇 번 이야기 나눴던 한 엄마가 톡을 보내왔다. 오늘 왜 못 오냐는 질문에 사정을 얘기하며 마음이 데워졌다. 백일 된 막내를 돌보느라 한창 피곤할 그 엄마에게 축하와 수고의 말을 건넸다. 사실 난 그런 말을 더 하고 살고 싶다. 나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게 길가던 엄마들에게 말을 시키고 싶을 때가 있고 모르는 그 아이들에게 괜스레 웃어주고 싶다. 나만 그런 건 아닐 텐데 다들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많이들 진심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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