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봄부터 부모님이 지은 전원주택 2층에 살고 있다. 아이들 라이드로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이 크지만, 마음 편한 휴식처이기도 하다. 아무리 뛰고 소리쳐도 관대한 아래층이 있다. 내가 결혼 전에 몇 년 쓰던 방은 이제 책상과 아이들 장난감으로 들어찼다. 같은 남향인데도 이 방에는 유독 햇볕이 듬뿍 든다.
"예전에 살 때는 몰랐는데 볕은 거실보다 이 방이 더 좋더라고."
"아버님이 딸래미 좋은 볕 받으라고 이렇게 지으신 거지."
남편과 함께한 지난 12년을 탈탈 털어도 이 말만큼 날 감동시킨 말이 있을까 싶다. 내가 나의 부모에게 귀하고 귀한 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 더 덧붙인 말 없이도 나의 귀함을 알고 있다는 표현으로 느껴져 마음이 찌릿했다. 네모난 데크까지 딸려있는 이 방에는 분명 내가 몰랐던 애정이 그득할 것이다. 알지만 당연해서 그다지 감동이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이 방의 커튼을 열 때마다 데크를 보며 생각한다. 벌이 날아올까 잘 나가지 않던 그 공간이 있어 아기자기했던 20대 마지막의 내 방. 이곳에서 어떤 꿈을 꿨었더라.
"으앙!"
"헉! 미안해!"
둘째의 울음이 터짐과 동시에 나는 털썩 바닥에 앉았다. 유치원에서 초록 풍선으로 만들어온 수박의 손잡이를 잘라주려다 풍선이 터졌기 때문이다. 풍선 탓을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남은 하루를 빨리 정리하고 싶은 급한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늘 덧붙이듯이) 힘들게 만들었다는 수박이 터졌다는 사실에 아이는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미안하다 달래며 초록 풍선을 찾아 방을 뒤지던 나는 안 그래도 오늘따라 늦어지는 마감에 기운이 빠졌다. 마음은 알겠는데 어서 너희가 쿨쿨 잤으면 좋겠다.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요?"
갑자기 날아든 첫째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뭐가 되고 싶었는데 되지 못하였냐는 물음으로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묘한 반응에 이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냐 묻는 표정이다.
"글쎄? 되고 싶은 게 많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진짜 뭘 원하는지는 별로 귀 기울이지 못했다 싶어."
마감 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불을 끄고 10분간 클래식 감상 시간을 가졌다. 비록 바이엘 2권을 배우고 있지만, 어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고 싶다는 첫째 덕분에 요 며칠 시작한 루틴인데 생각보다 많은 생각과 기억을 불러오는 시간이다. 오늘의 선곡은 드뷔시의 달빛이었다. 피아노로 칠 수 있는 곡 중에서 제일 빠르고 어려운 곡이 뭐냐고 묻던 첫째는 이미 방을 가득 채우는 이 곡이 너무 느리단다. 너희들 덕분에 마음에 평안을 얻고자 튼 거라고 하려다 꾹 참고 대답해주었다.
"빠른 곡이라고 꼭 어려운 것도 아니고 느린 곡이라고 쉽진 않아."
"그렇지만 빨라야 치기 어렵죠!"
"땅땅땅 맞는 음을 잘 쳤다고 무조건 듣기 좋은 건 아니거든. 그리고 느린 곡은 빠른 곡보다 더... 들키기 쉬울걸?"
"?!"
아이는 여전히 빠른 곡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빠르고 화려한 곡이 멋있어 보이는 거겠지? 내일은 빠른 곡 들려줄게. 걷는 법을 잊은 너희들의 발처럼 빠른 곡 말이야. 오락가락하는 성장통과 한결같은 먹성으로 성실하게 자라는 아이들은 어디 아프다고 엄살 부리며 칭얼거리다가도 재밌는 일이 생기면 다 잊은 듯 팔팔거리며 뛰어다닌다. 아래층에 계시는 너희 외할아버지께서는 매일 무슨 사고라도 나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며 이게 노는 소리인지 사고 난 상황인지 헛갈리신단다. 소음에 인이 박혀 이제야 적응이 좀 되려는 참이라는 외조부모의 심경과 이렇게 시끄러워도 되나 혼란스러운 내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오늘도 볼륨 조절에 실패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이 밤에도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랄까.
너희는 온갖 생각에 복잡한 나와 참 다르다. 너희들의 체력과 회복탄력성이 부러운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