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무탈한 오늘

빼곡한 달력과 텅 빈 다이어리

by 미미

가끔 카페에서 아이를 기다리느라 버릇처럼 책과 다이어리를 챙겨 나간다. 물론 해야 할 일이 생각나 검색하다가 시간이 반쯤 흘러간다는 것이 팩트지만, 다이어리는 어쩐지 같이 가야 할 것 같은 일정이다. 다이어리를 펼쳤다가 한참 멈춰 있었다. 텅 빈 다이어리 곳곳에 짤막한 메모가 전부다. 연애시절에 남편이 말하길 진짜 다이어리 그렇게 쓰는 사람 처음 봤다던 내 빼곡한 기록은 이제 벽달력으로 옮겨갔다. 수첩을 펼칠 여유도 없이 달력에 갈겨쓴 아이들 일정이 가득한 탓이다. 나쁘다 여기면 안 될 것 같은 엄마 된 자의 성스러운(?) 영역처럼 날 차지한 그 일정들은 오늘도 무탈하게 지나갔다. 피로함에 멍한 기분을 빼고는 아이들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는 오늘을 성공이라 결론짓는다.


달력은 빼곡하게 찰 동안에 곳곳이 텅 빈 채 덮여있던 나의 다이어리는 이제 여름을 맞았다. 여태 이만큼 무탈하게 시간이 흘러갔다는 건 분명 감사한 일이건만 갑자기 허탈한 마음에 휩싸인 게 솔직한 내 모습이다. 나의 기록은 어디로 갔는가. 아이들의 기록은 온전한 나의 기록이 아니지 않은가. 요즘 나는 일상 속에서 의미 찾기 삼매경에 빠진 듯하다.


지난 주말, 2년 전 한국에 귀국해 맞이한 첫 봄에 찍은 우리 부부의 사진을 보았다. 이것만 봐도 젊었다는 남편의 헛웃음에 들여다본 사진 속 나는 정말 지금보다 환해 보였다. 나는 좀 더 나이 든 얼굴로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을 텐데, 과연 그날들은 의미 있는 하루들이었을까? 발전해야 할 것만 같고, 꾸준히 칭찬받고 싶고, 어떤 내세울 만한 결과가 손에 쥐어져야 할 것 같은 이 강박은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다. 전업맘의 위치는 그런 것을 누리기 적합하지 않다는 게 분명한데 말이다.


온라인 프로그램으로 영어를 진행하고 있는 첫째는 1년이 끝나가는 프로그램 멤버십을 갱신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작년과 같은 레벨 테스트를 해보았다. 사실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셋이 씨름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한 녀석씩 붙들고 뭔가 하기 어려웠기에 1년 전보다 별로 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첫째는 같은 레벨을 작년의 반도 안 되는 시간만 쓰고도 더 좋은 점수를 얻었다. 으쓱하고 다시 로봇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의 무심한 모습을 보다 마음이 좀 부드러워졌다. 나 또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나날들이 쌓여 꽉 찬 세월을 증명할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첫째 학교 준비물로 어릴 적 사진을 가져오라기에 앨범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빨간 차가 타고 싶었던 아이가 모르는 옆 차를 타겠다고 떼쓰던 어느 여름날의 주차장, 간식거리 더 달라고 냉장고 앞에 누워버리던 아이의 격정적인 시위. 손으로 먹던 국수가 입에는 잘 안 들어가고 자꾸 손바닥에 들러붙자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던 황당한 현장, 낙엽으로 온몸이 덮여 얼굴만 내민 채 방긋거리던 가을날의 공터. 어디부터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나 싶었던 기억들이 갑자기 사진과 함께 떠올랐다. 이제 점점 귀여움을 덜어내고 내 시선에 거슬리기 일쑤인 아이들이 갑자기 작고 소중한 보물 같아지는 순간이다.


"더워."

"이불을 덮지 말아 볼래?"

"그럼 또 추워요."

"그럼 반만 덮어."

"그럼 더운데..."


재우고 할 일이 산더미인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춥다 덥다를 반복하는 녀석에게 어쩌라고 그러냐는 말이 입가를 맴도는 찰나, 둘째는 대뜸 내 팔을 가져가 품으로 쏙 들어와 안겨서는 웅얼거렸다.


"엄마 품에서 벗어나면 추워요. 근데 내가 이렇게 하면 엄마 팔 아픈가?"


팔베개를 하며 품에 안겨서는 내 팔의 안녕을 걱정하며 작은 손으로 몇 번 조몰락거리던 아이는 그제야 춥다 덥다 타령을 멈추고 금세 잠들었다. 그 적당한 온기에 나 또한 안도감이 들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나와 아이 사이의 온도처럼 오늘 또한 가장 적당하게 지나간 것이 아닐까 싶어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봄의 마지막 밤,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 주방의 작은 창문을 열고 테이블에 앉았는데 춥지도 덥지도 않다. 아, 정말 소중한 계절이구나. 당장 첫째 이비인후과와 둘째의 축구 테스트 수업이 잡힌 내일 스케줄이 좀 복잡해서 머리를 굴리며 고민 중이지만 이 투덜거림과 무관하게 나는 또 무탈할 것이다. 사람 놀라게 너무 특별히 좋거나 누가 갑자기 누구 하나 아프거나 하는 일 없이 오늘이랑 비슷할 작정이다. 내 계획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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