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뱃속에도 태어났어도 우린 물과 기름이었다.
작은언니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는 해에 결혼했다.
신혼집이 우리 집 근처 이기도 했지만 시집 근처이기도 해서 우리 집에 놀러 오는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작은언니의 부재는 나에게 빈자리가 아니었다.
데면데면이라는 단어조차 우리 사이에는 지나치다-라고 생각될 만큼 교류가 없던 어느 날
15살인 나는 처음 자살시도를 할 만큼 우울 장애 증상이 심했고 20대 끝자락이었던 언니는 아기를 유산했다.
누가 빚어놓은 것 마냥 동그랗고 복스럽던 언니뱃속에 더 이상 아기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슬프고 언니가 안쓰럽긴 했지만 나는 입 밖으로 위로하지 않았고 언니도 나와 독대할 만큼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의료사고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엄마와 언니는 해당 병원에 가서 농성을 하기도 했으며 시집의 은근한 눈치와 압박에 언니는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다시 임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장남에 독자였던 형부 가문에 명맥을 잇기 위하여 언니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 15살의 나는 헤아릴 수 없다.
손주를 잃었고, 자식을 잃어서 상실하는 딸을 보면서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엄마에게 달달 들볶이는 것도 죽을 맛이었고 생명을 잃은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던 어린 나이였다. 15살의 나 역시 밀려오는 우울감으로 일상을 일상답게 보내는 일조차 힘들었다.
훗날 작은언니가 말했다.
내가 애 유산했을 때 가족들이 뭐, 나한테 해준 거 있어?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내가 무언가를 해줬어야 하나?
내가 무언가 해줬어야 했는데...
나보다 언니가 더 힘들었을 텐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었겠냐만, 언니가 가족들을 싸잡아 탓할 때마다 나는 미안했고 죄책감이 들었다.
게다가 엄마가 나에게 자주 했던 말이 "너는 방관자야, 가족들이 뭘 하든 네가 관심이나있냐?" 였기에 교류가 없는 가족이긴 했지만 내가 너무 무심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19살이 되었고 작은언니에게도 아기가 생겼다.
작은언니는 자연임신이 아닌 병원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임신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그게 인공수정이었는지, 시험관 시술이었는지 생각이 안 난단다.
"아니, 어떻게 자기가 뭘 해서 임신했는지도 몰라? 주기적으로 주사 맞았어?"
"기억이 안 나"
"오 마이갓이다"
언니는 자기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임신했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고 그저 어른들이 끌고 다니는 대로 다녔던 모양이다.
부부의 사생활에 관심 가지고 싶지 않지만... 아기를 출산 한 이후로 부부사이는 극으로 치닫을 정도로 나빠졌고 혼자서 아기 돌보기 힘들어했던 언니를 돕기 위하여 매일같이 작은언니 집으로 출석도장을 찍었다.
보통 동생이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앞둔 시기라면 조카 보러 집으로 온다고 해도 말려야 하겠지만 작은언니는 와줘서 고맙다고 내가 와줘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내가 언니에게,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생각했다.
야자를 빼먹고 조카를 돌보러 가거나 아침 일찍부터 언니네로 가서 조카를 보다가 결석을 하기도 했다.
언니는 그것에 감동받았다.
나의 희생 어린 양보가 계속될수록 언니는 한숨 돌릴 수 있다고 좋아했고 동시에 육아에 무관심해져 갔다.
나와 가족들이 아기 육아에 도움이 되니깐 부부는 서로 배려하고 도와가며 아기를 육아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에 바빴고 서로의 차이점을 찾아 비난했으며 서로의 원가정을 헐뜯고 깎아내렸다.
그토록 원하던 아기가 태어났는데 왜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형부의 귀가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늦어지는 시간만큼 언니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내가 없으면 작은언니 부부가 싸울 테고, 언니가 아기를 두고 나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언니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내가 있다고 부부가 싸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서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며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기에 나는 아기를 둘러업고 둘을 뜯어말려야 했다.
등뒤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아기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고 이 부부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다.
그때, 엄마는 내가 작은 언니네서 아기를 돌봐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언니네 가서 아기를 봐주는 나에게 '하인' '집사' '따까리'라고 조롱했고 내가 안 갈 테니 엄마가 가서 아기를 보라며 싸우기 일쑤였다. 시집은 우리 집에게 아기를 책임지라 했고, 우리 집은 시집에게 아기를 책임지라 했다. 부부는 끝없이 싸우고 부부싸움은 집안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파국에 이르렀다.
둘이 파국에 이르기 직전, 어느 때처럼 아기를 재우다 거실에서 잠이 들었고 새벽녘 눈이 떠졌다.
베란다를 보니 작은 형부가 무언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밖에 뭐 있어요?
형부에게 물어보며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낯선 차에서 작은언니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형부를 쳐다봤다.
작은언니를 바라보는 그 눈에는 분노와 슬픔, 연민, 증오가 방울방울 서려있었다.
그 눈이 너무 처량해서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나는 형부인생의 악역으로 나오는 와이프의 동생이 아니겠는가.
그저 조용히 베란다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형부도 곧이어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술냄새와 짙은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왠지 눈물이 난다.
언니, 왜 이렇게 살아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언니가 원하던 아기도 낳았잖아
가족들이 언니를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면서, 다들 언니 잘 산다고 하는데 왜 언니 혼자 자꾸만 지옥문을 두들기는 거야?
왜 언니 혼자 괴로워하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이렇게 살 거면 아기를 낳지 말지
이 아기를 나에게 보라고 하지말지
아기의 불행이 나를 관통해서 마음이 찢어진 것 같아
작은언니는 이혼했고 아기는 우리 집을 떠나 아빠의 손에서 자라게 됐다.
언니도 상상 못 할 상실감을 느꼈겠지만 엄마와 나 또한 상실감과 허무함으로 피폐한 날들을 보냈다.
이 사태가 일어난 것에 대해 모두 형부를 헐뜯고 잘못을 떠넘겼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가족들은 "편드를 사람을 편들어라" "너는 저 집 가서 평생 하녀나 해라" 하며 그를 욕하지 않는 나를 비난했지만 그날 새벽, 형부의 눈물은 끝내 나를 입다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작은언니는 집을 나갔고, 나와는 다시 접점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