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지만 떠나면 다시 뒤돌아보게 되는 곳
내가 19살 때 집을 나가서 22살 되는 해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혼하면서 받았던 얼마 안 되는 위자료는 남지 않았고 언니는 매우 단출한 모습에 수척해져 있었다.
눈이 퀭하니 파여서 기괴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기겁하며 다시 쫓아내려 했지만 피골이 상접한 딸을 보니 마음처럼 안되나 보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 자체가 낯설었던 것은 둘째치고 3년 동안 되는대로 살았던 언니의 습관을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무기력했고 씻지 않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머리를 지끈하게 할 정도였다.
언니는 밤낮으로 시간 가리지 않고 깨작깨작 먹어댔다.
제대로 된 식사시간에 제대로 앉아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쭈그려 앉아서 두 세 젓가락 먹고는 치우고 금세 밥상으로 와서 다시 두 세 젓가락 먹고 치우고를 반복했다.
평범하게 밥 한 공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는 날에는 변기통을 부여잡고 구토했다.
화장을 지운 클렌징티슈를 밥상에 올려둔다던지 식당에서 반찬을 휴지에 담아 가방에 담아 오고 잊어버린다든지... 엉뚱한 행동들 때문에 가족들이 꾸지람을 하면 자신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악을 써댔다.
언제는 점쟁이가 신을 받아야 했다며, 자기 대신에 엄마가 신을 받으라고 엄마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이혼 후 3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는데 호프집 서빙이나 골프장 캐디, 부업 등을 했고 간간히 남자친구들을 사귀면서 그럭저럭 살았단다.
아이아빠에게 가버린(언니 말대로 한다면 빼앗긴) 아이가 보고 싶었지만 누추한 단칸방에 데려올 수 없고 아이아빠도 아이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서 혈혈단신 혼자의 몸으로 3년을 보냈다.
당시, 나는 몰랐지만 언니에게는 자잘한 빚들이 있었는데 그 빚을 갚아버리면 위자료가 남지 않으니 빚을 갚지 못했고 빚에 대한 독촉장은 작은 언니가 바꾼 주소지였던 큰언니집으로 매 달 찾아왔다.
동생의 빚까지 갚을 형편이 아닌 큰언니는 동생이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도 속상하고 답답한데 매번 자기도 모를 이자독촉장이 오니 미칠 노릇.
가족들의 따듯한 말 한마디와 다독거림이 필요했던 작은 언니에게 현실적으로 돌아온 것은 엄마의 싸늘한 무관심과 큰언니의 짜증 어린 다그침이었다.
22살의 나는 언니에 대한 안쓰러움도 잠시였다.
동생으로써 나를 사랑한다 했지만 양아버지 자식이었던 나를 비하하고 비아냥 거렸던 언니에 대한 은근한 분노와 이렇게 타락해 버린 언니의 모습이 참혹하게 느껴져서 외면하고 싶었다.
서로 쳐다보는 것, 말을 섞는 곳, 한 공간을 쓸 때는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불편했다.
언니는 몸을 추스를 동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는 자연스레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졌다.
방 한 칸에서 굼벵이처럼 움츠러있는 언니에게 엄마는 화가 난 사마귀가 앞다리를 마구 할퀴어대듯 모진 말을 쏟아냈다.
아휴. 저 미친년. 저렇게 살려고 이혼했냐?
저 병신 같은 년. 뭐 하나 제대로 할 줄도 없는데 먹을 건 꼬박꼬박 잘 찾아먹네
내가 쟤를 낳으려고 낳은 게 아니라 진짜 내가 내 배를 쳐서 애를 죽이고 싶었는데...
언니도 엄마도 술을 먹고 신세를 한탄하며 고함을 지르고 잠에 들었다.
언니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홀짝홀짝 소주를 들이켜거나 물처럼 맥주를 마셨고 엄마는 매일 밤 울면서 소주잔을 비웠다.
우리에게 낮은 고통을 외면하는 시간이었고 밤은 고통을 마주치는 시간이었다.
같은 집 다른 공간에서 매일 밤 고독과 절망감으로 몸부림쳤다.
우리 가족은 서로가 있어서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에게 '가족'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늘 떠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곳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 같다.
떠나고 싶어 했지만 떠나면 다시 뒤돌아보게 되는 곳.
24살에 결혼 이라니 이른 나이에 이른 판단이었지만,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나의 판단으로는... 결혼만이 집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으로 편입되면서 우리 가족과의 유대감을 떨어뜨리고 싶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작은언니와는 수없이 많이 싸웠다.
결혼 준비 하는 내내, 나는 언니와 말을 섞지 않았는데 자꾸만 중간에 끼어들어서 잘난 척하지 말라며 훈수를 두고 자기가 결혼하면서 준비했던 과정과 비교했다.
파국으로 끝난 결혼 생활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도 다시 생각하니 비극적이었다.
남편 될 사람의 기를 꺾어야 한다느니 시집한테 받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받아야 하는데, 또 그걸 받으면 받는 대로 약점이라...
언니가 살면서 몸소 겪은 억울하고 불편했던 불운에 대해서 매일같이 친절하게 가르쳐줬고 나는 부정적인 생각과 말 자체를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다툴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언니, 내가 함께 지냈던 시절에는 아이아빠한테 가 있던 작은언니의 아이도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아이 앞에서 아이아빠 (작은언니 전남편) 험담을 하거나 욕 할 때, 술을 많이 마실 때도 나와 다퉜다.
한 번은 "너도 너네 아비랑 똑같다"며 아이 머리를 밀치는 언니와 엎치락 덮치락 몸싸움한 적이 있는데 아이가 자기 엄마랑 싸우지 말라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모,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세요.
우리 엄마 잘못 없어요.
그래도 자기 엄마라고 울면서 내 다리에 매달려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진짜
진심으로
지긋지긋하다.
우리로 끝내고 싶었던 불행이 아이에게도 드리우는 순간에 나는 작은언니를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머리채를 잡고 벽에 박아 버리고 싶었다.
아이가 매달려 있는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진다.
순간 관자놀이 터질 것 같은 통증과 왼쪽 가슴이 지독하게 아파왔다.
마음이 아픈 느낌이 아니라 실질적인 통증이었다.
여담으로 추후 신경정신과에 방문했을때 이런 통증에 대해서 여쭤보니, 우울 장애에 동반될 수 있는 신체화 증상으로 스트레스와 불안도가 높아질 때 나타날 수 있단다. 신체화 증상으로는 두통, 흉통, 복통, 구토, 설사, 소화기 장애 증상, 복부 팽만감, 가슴 두근거림, 가려움, 팔다리에 힘 빠짐, 울렁거림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늘 흉통과 가슴 두근거림, 두통, 가려움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나의 결혼식날
며칠 동안 말 한마디 섞지 않았던 작은 언니가 쭈뼛쭈뼛 나타났고 나 역시 엉거주춤 하니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언니" 하며 불러본다.
작은언니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곧이어 평생 기억에 남을 결혼식 축사가 들린다.
너... 앞으로 인생 똑바로 살아...
그딴 식으로 살지 말고...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토록 처참하게 솔직한 축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축사는 그녀의 축하인가 저주인가.
그때의 나는 그 말 한마디가 분하고 두려워서 바로 뒤돌아 연회장으로 들어갔지만 이제는 말해본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 그날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제는 약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의 침묵이 언니의 자존심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생각한다.
안 그래도 불행하게 살고 있는 여인에게 동생의 침묵과 무기력한 눈동자, 무관심함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수 있다.
싸우기 싫어서 말하지 않았고 언니가 오해할까 봐 쳐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 혼자 기뻐하며 언니가 약 올라할까 봐 웃지 않았던 것이고 내가 위로하면 비참해할까 봐 다독이지 못했던 것이다.
언니는 그런 생각들이 서운하게 생각되었던 것일까
이제 와서 내가 어떻게 생각한들,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자매였지만 남이었고 사랑했지만 동시에 증오했다.
나는 새아버지의 딸로, 언니가 가져야 할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가져간 매정한 년이고 언니는 나를 질투하고 험담하는 저주였다.
함께 있으면 우리는 괴로웠다.
그래서 우리는 다신 보지 않기로 했다.
분명히 상호 간에 합의된 약속이었는데도 간혹 언니에게선 <사랑하는 동생, 잘 지내니> <너는 어쩜 번호도 지우고.. 사람이 참 매정하다>라는 메시지가 온다.
아직도 모를 사람이다.
참 엉뚱하다.
하나, 확실한 점은 내가 다시 우리 관계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다시 괴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