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장애 일상 - 짜증 나도 괜찮아?

짜증 나도 괜찮은 사람

by 미미



내가 타인 앞에서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은 "짜증나" 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분노, 성가심, 슬픔, 질투, 신경질, 불편함 등등 부정적인 감정 대부분을 '짜증'이라고 말하며 끝내는 "괜찮아, 괜찮아"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양한 감정들은 '짜증'이라는 감정 속에 가둬버리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소한 성가심부터 큰 분노까지 단순히 짜증 나는 게 되어 버렸고 나아가 이유 없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내가 왜 짜증 난다고 생각하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원인으로부터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해결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할 것인지에 대해 점점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끝내는 정상적인 사고처리과정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10여 년 전에 1년 동안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에도 상담 선생님이 이런 점에 주의를 주셨었다.



미미 씨는 짜증 났었다고만 하고 화를 내지는 않았네요.
미미 씨는 진짜 괜찮았나요?
미미 씨는 괜찮다는 말을 자주 하네요.


20대 초반에 했던 심리 상담이었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언니가 "너는 네 아비 닮아서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라고 했을 때,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고 그저 짜증 났다.

엄마가 언니들에게 내 험담을 하고 이간질을 했을 때, 나는 엄마에게 인간적인 배신감과 억울함, 분노를 느꼈지만 내 입에서는 나온 말은 "짜증 나네"

아버지가 *섬망 증상으로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자식들만 기억했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서운함과 좌절감을 느꼈지만 역시나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섬망 : 신체 질환이나 약물, 술 등으로 인해 뇌의 전반적인 기능장애가 발행한 것. 치매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내가 느끼는 대부분의 부정적인 감정을 짜증 난다고 표현하면서 서서히 잊으려 했지만 감정들은 전혀 잊히지 않았고 내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짜증 난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상을 보내면서 문득 과거의 일이 생각나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이 휘몰아치면, 나는 금세 우울해진다.

마음속에는 폭발할듯한 분노가 일 끓지만 안으로 꾹꾹 가둬버리고 그럴수록 우울함은 나를 삼켜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기도 한다.

멍해지고 남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답답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바위 덩어리가 꽉 막힌 듯싶다.

점점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과하게 호흡하게 된다.

자살충동이 커진다.

머릿속에는 너무나 많은 사사로운 생각들이 얽혀 정상적인 생각과 사고가 상실되었다.

아, 살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



괜찮아, 괜찮아...

.

괜찮아...

.

괜찮아?...

.

나 정말 괜찮은 걸까



신경정신과에 다니고 약을 먹으면서 기분이 큰 곡선 없이 완만하게 유지되면서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나는 분노를 극도로 억제한다는 것과 짜증 나 라는 말을 정말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거나 그 상황을 해결하면 되는데 말로만 짜증 나고 정작 누군가 내 상태를 물어보거나 상황 해결에 대한 조언을 주면 괜찮다-고만한다.

짜증 나면 괜찮은 게 아닌데 짜증 나도 괜찮은 줄 알았더니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극도로 소심하게 표현하고

극도록 과도하게 현실을 도피한 결과로

늘 자살 충동을 느끼는 우울 장애인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과거의 일들이 문득문득 생각나서 나를 우울의 늪으로 패대기치곤 한다.

사실 이건... 나도 아직 통제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재 일어나는 일에서만큼은 분노하고 억울해하고 서러워하고 서운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내가 이 상황에서 왜 이런 감정을 느꼈는지, 내 기대와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도.피.하.지.않.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내 입장에서는 괜찮다고 도피하는 게 더 익숙하고 쉬운 선택이지만 우울 장애는 치료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깨닫고 내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브런치스토리에 우울 장애를 겪게 된 과정을 적는 것 또한 과거의 일들을 정리해보면 내가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해 깨닫고 과거의 일을 털어놓기 위해서였는데 생각보다 과거에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이 어마어마해서 매번 놀라고 있다.



내가 모르는 과거의 내가 "괜찮다"는 말속에 너무나 오래 갇혀 있다.

짜증 나도 괜찮았던 과거의 내가 분노할 때다.

그것이 우울 장애를 치료하기에 좋은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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