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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Feb 20. 2024

절제된 삶이 우울감을 조절한다.


우울장애를 앓은 지 몇 년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우울장애에 걸렸던 걸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도록 했다.

한 가지 이유, 어느 하루를 기점으로 우울장애를 정의할 수 없었다.

내 부모님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했으니 유전적인 영향도 있을 테고 시끄러운 가정에서 자랐으니 환경적인 영향도 있을 테고 원래 성격이 조용하고 독립적이라 기질적인 영향도 있었겠구나 싶다.

우울감은 나와 필연적이었다.



우울감에 빠지면 별 지랄스러운 행동을 다한다.

나의 경우에 가장 파괴적이지 않고 영양가 있던 행동으로는 무작정 걷기가 있고 가장 파괴적이고 피해야 할 행동으로는 음주와 자해, 약물과다복용이 있었다.

지금도 우울감에 빠지면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생각과 돌발적인 행동이 나오려고 하는데 최대한 걷기와 정적인 활동들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스스로에게 파괴적이지 않고 우울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굉장히 절제된 행동이다.

이 행동으로는 즉각적으로 쾌감을 느끼며 우울감 해소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걷기나 독서, 글쓰기 같은 절제된 행동들은 파괴적이지 않고 도리어 나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



음주나 자해, 약물과다복용 같은 경우에는 우울감이 해소되면 더 큰 괴로움을 동반한다.

신체적인 고통과 죄책감, 좌절감, 후유증이 뒤따랐다.

음주 후에는 늘 심한 두통과 구토로 하루를 보냈고 태생이 음주를 못하는 나는 온몸이 아팠다.

자해 후 상처가 아물면서 심한 간지러움을 동반했는데 살 거죽을 다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고 흉터는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우리 땅은 퇴적물이 차곡차곡 쌓여서 지층이 생기게 되는데 자해 후 상처는 아물어도 그 자리에 일상이라는 퇴적물이 쌓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피부와 더 차이가 났다.

아직도 마구잡이로 지그재그 쳐져있는 하얀 흉터가 팔목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약물과다복용 후에는 사람의 영혼이 반쯤 빠져있다.

죽은 것도 아닌데 산 것도 아니다.

멍-하니 숨만 쉬고 있는 인간 좀비가 된다.

교감신경을 촉진할 수 있는 약물을 과다복용 하게 되면 하루종일 기분은 좋아서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그러다 갑자기 떨어지고 싶다.

하늘 위를 날지 못한다면 그대로 낙하하여 죽을 것이다.

우울삽화 재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약을 과다복용 하게 되면 굉장히 차분해진다.

오랫동안 잠을 잔다.

계속 잔다.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버린다.







우울감을 즉각적으로 해소하고 싶었고 충동적인 돌발행동을 막지 않았다.

위와 같은 경험 끝에 우울감을 조절하는 것은 나를 파괴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느리지만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이구나를 깨달았다.

이것이 이론으로는 당연한 가치인데 몸으로 깨닫고 절제하기에는 참 힘들다.

나는 지금 당장 걷고 싶지 않고 술을 퍼붓고 다 토해버리고 싶거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다.

독서하며 잠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약을 입 속 가득 넣고 잠깐 죽었다 깨어나고 싶다.



우울장애 치료를 위해 약을 먹으면서 우울감이 올 때마다 아주 조금씩 객관적으로 나를 보살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절제된 삶을 실제로 실천시킨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절대 혼자 마시지 않는다.

꼭 나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을 대동한다.

그리고 나는 정해진 양을 먹으면 반드시 잔다고 생각한다.



나는 몸에 흉터 생기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해진다.

자해하고 싶어서 몇 번이나 칼을 들다가도 팔뚝에 얼기설기 남아있는 흉터를 보면, 칼을 내려놓고 머리를 쥐 뜯게 된다.



약은 꼭 먹을 만큼만 처방받는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아픈 것은 두려운 간사한 인간인지라 약을 과다하게 먹고 아팠던 기억을 상기한다.

솔직히 약물로 죽기는 어렵다.

죽는 것보다 더 아프다.

죽을 생각으로 약을 털어 먹는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나이가 드니깐 실익을 따지게 된다.

즉각적으로 우울감을 해소하는 것은 멀리 볼 때 나에게 손해를 안겨준다.

몸소 손해를 입어보고 괴로움을 겪어보니깐 나에게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더라.



우울장애인인 나도 성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울감이 제법 똑똑하게 나를 조종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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