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주마등-탄생 비화(悲話)

탄생을 축하합니다.

by 미미




자라면서 엄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엄마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 언니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

이제는 나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해볼까 싶다.



방탕하지만 돈 많은 아버지, 사람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 인복 없던 엄마

내 부모님을 아주아주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자식들이 많았고 엄마 말고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버지란 '돈을 수단으로 인간의 밑바닥까지 지배하려고 했던 야비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는데 실제로 아버지는 오로지 돈을 통해 하수인을 만들거나 자신의 수발을 들게 했기 때문이다.

뭐, 엄마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무언의 존재가 세포분열 하며 엄마 몸에 안착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엄마는 많은 고민을 했단다.



'나이도 많고 아이 아버지가 될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서로에겐 이미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식은 필요 없다.'

'그럼에도 뱃속에 있는 그 사람과 나의 아기'



아버지는 평소에 엄마의 변화에 썩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근심 어린 엄마를 보더니 혹시 임신했냐고 묻더란다.

그렇다 하니깐 그럼 낳자고 했단다.

우리 사이의 끈이 하나 있어야 하지 않냐고, 그래야 우리도 부부 아니냐고.



관자놀이 빠질 것 같이 고민했던 엄마와 다르게 아버지는 단숨에 나의 생사를 결정해 주었다.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따져 물어야 할지...

무튼, 가난한 형편에 언니들을 임신하여 고생했을 때와 다르게(만삭까지 가정주부일을 했었다.) 나를 임신했을 때는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고 방탕했던 아버지가 다른 여자들보다 엄마를 자주 만나러 왔기 때문에 엄마는 행복했다.

평범한 가정을 이룬 것 같았다.

뱃속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는 온전히 엄마의 남편으로 남을 것 같고 엄마와 함께 살 것이라 생각했단다.

엄마의 일생 중에서 나를 임신했던 10개월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때라 하는데...

어느 이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는 일상이 사람이 고프고 사랑이 고프고 가족이 고팠던 여자에게는 평생 동안 기억에 남을 행복이었다니, 사람 인생 이란 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그렇게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의 어느 날

내가 태어났다.

신생아인데도 키가 크다 했단다.

나를 받아 준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자기가 봤던 신생아 중 가장 이쁜 아기라고 해줬단다.



여담이지만, 임신을 알게 된 엄마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빠져있으니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이 아기를 낳으셨으면 좋겠다 했단다. 막둥이가 엄마에게 크게 효도할 거라고.

나의 존재를 가장 먼저 축복해 준 사람으로, 나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

얼굴도 본 적 없고 그때도 고령의 의사였으니 지금은 이 생에 안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통해서라도 감사의 인사 전하고 싶다.



나의 존재를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때는 산후조리원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이틀뒤에 신생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를 낳으러 갈 때도 새벽녘 서늘한 바람을 헤치고 혼자 뒤뚱뒤뚱 걸어갔다는데 아기를 낳고서도 혼자 어기적어기적 걸어온 가녀린 여인.



그 후 열흘 후 아버지가 나를 보러 왔단다.

손에는 분유 몇 통을 들고.

자기랑 귀도 닮고 코도 닮았다고 좋아하며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다시 떠났단다.

그 후로 아버지는 아기가 보고 싶거나 안아주고 싶어서 온 적은 딱히 없지만 아기 키우는데 섭섭하지 않도록 매 달 적잖은 돈을 주었다.

간혹 엄마의 큰언니가 와서 아기의 목욕을 씻겨주거나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줬단다.

떼쓰거나 보채는 일 없이 잠이 많은 아기라서 키우기 수월했단다.



나를 임신했을 때 엄마의 형제들은 아기를 당장에 지워버리라며, 태어나서는 안된다고 했기에 (엄마가 노산이라 위험하기도 했다.) 나의 존재를 굳이 다른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조용 키웠다고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천덕꾸러기.

나의 존재를 아는 모두가 축복이 아닌 격정스러운 걱정을 했다.

누군가는 당장 지워야 한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내 아비처럼 방탕하게 살게 될 거라 했단다.



사람들의 걱정과 다르게 자란 나는 엄마의 성취감이었고 훈장이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게 된 이 이야기를 꽤 좋아하는 듯싶다.

그때를 기억하면 힘들긴 했지만 행복했고 다시 돌아가서 젊음을, 어린 아기의 엄마를 다시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의 성공스토리?

엄마의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

엄마 일생에서 가장 평온했을 때의 아련한 추억?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듣고 싶지 않지만...

여태까지 대략 100번은 넘게 들었다고 자부한다.

엄마에겐 아련하고 행복했던 기억인데 나에게는 왜이리 슬프고 비참하게 다가오는것일까



슬프고 비참하니깐 그만 이야기하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저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고생 많이 했다고, 엄마를 다독이며 나는 아버지와 다르게 무척 도덕적이고 이타적이라고 열변을 토할 뿐.

엄마에게는 사람들의 비난과 고된 일생 속에서 생명을 지킨 탄생비화(比話)겠지만 나에게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탄생비화(悲話)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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