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한 회전목마:

느릿함의 보호

by lea

이제 새벽에 눈이 뜨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도

한두 시간을 냉기가 흐르는 거실 바닥에서 얕은 잠이 들었다.

몸은 시곗바늘이 느려지는 늪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뭉그적거리며 다시 침대로 들어가 잠의 경계로 스르륵 들어갔다가, 기어코 9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약 15분간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약하게 데워진 몸을 찬물 샤워로 흐릿한 정신을 깨우는데 충분했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은 머릿속에서 군더더기 없이 일직선으로 그려졌지만, 이상하게도 육체는 그 속도에 맞추기를 거부했다. 마치 회전목마가 멈춰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릿느릿한 리듬을 고집했다.

서두름이 없는 날.

이런 날은 저항해 봐야 정신이 깨지고 서글픈 생각만 떠오르기 때문에 나는 그 리듬에 순순히 몸을 맡기기로 했다.


우선,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다. 그리고 겨우 옷을 입었다.

꾸밈은 배제하고 어제와 같은 옷으로 간단히 걸쳤다.

일단 옷을 입으면 외출이라는 행위가 의심 없이 실행되는 나만의 규칙이랄까.


카페를 먼저 갈까, 치과를 먼저 갈까, 한의원을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치과라는 필연적인 방향으로 차를 불렀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몸의 배터리는 거의 방전 직전이었다.

힘이 없다.

밖에서의 모든 스케줄을 마친 오후에는 수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늘을 보니 온통 그레이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 도시의 우기는 맑은 날을 사치처럼 만든다. 폭우나 쏟아지지 않는다면 감사할 뿐


치과에 도착해 일곱 개의 치아를 치료받았다. 틍증을 잘 참는 편인데 오늘은 유난히 아팠다.

그 통증만큼 불필요한 우울감이 얕게 안개처럼 또 나를 감싸고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국에 다녀오기 전부터 시작한 치료는 벌써 서너 달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이 우울감은 신경이 아닌,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시작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진통제가 필요할 듯했지만 먹진 않았다.

결제를 하고, 치료를 위해 진한 마취제로 와그작 일그러진 얼굴에 자외선 차단제를 부드럽게 덧발랐다.

피부를 다듬는다는 것은 다시, 한발 나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임이다.

오늘은 한의원을 패스하기로 하고

다음 행선지인 카페로 가기 위해 휴대폰으로 차를 불렀다.


자카르타에서 거주하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자차나 택시를 부르는데 꽤 이용이 편리하고 의외로 싼 편이다. 도로가 늘 차나 오토바이로 막힌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요즘 자카르타에는 전기차가 부쩍 늘었다.

복불복으로 불러도 전기차가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욱 편리하고 좋다.

당연하게도 새 차라 깨끗하기 때문이다.

4분 정도 기다리자 역시, 전기차가 도착했다. BYD.


차 안의 에어컨이 너무 강해서 몹시 추웠다. 치과 치료도 받은 터라 몸이 더 요란하게 떨렸다.

인도네시아의 도시인들은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트는 경향이 있는 데다 지금은 우기라서 습기를 쫓아내려는 과도한 노력일 테다. 기사에게 에어컨을 조금만 줄여달라 부탁하고 몸을 차 안

구석 쪽으로 웅크렸다.


차창밖으로 흘러가는 도심 속에 푸른 나무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아 넋 놓고 보는 사이 드디어

옴베에 도착했다.

역시 사람이 가득 차 있다.

이 생동감 넘치는 장소에 와있어도 오늘의 기분과 행동은 분명 억지로 끌고 가는 느릿느릿함이었다.

전혀 신이 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이따가 집에 가서 수영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귀가 후에는 흐린 구름이 가만히만 있기를.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며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여 시원하게 홀짝였다.

***

자카르타에서 이리 오래 살았어도 딱히 만나는 친구도 없고 또한 직업이라고 부를만한 그림도 건강상 의 이유로 못하고 있으니 이렇게 기운이 없는 날의 감정은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든다.

***

그래서 느릿느릿한 걸까.

아니면 느릿느릿하기 때문에 안개가 걷히지 않는 걸까.


그것이 문제인 걸까. 그것이 문제였다.


타지에서 오래 살면서도 소속감이나 강한 목표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될 때, 무기력함 은 마치

우기의 폭우처럼 일상을 덮어버림인 것이다.


어쩌면 느릿함은 그 안개가 마음 깊숙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스스로 속도를 늦춰 나를 보호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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