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혼자 우울증, 무서운 희망의 중독.
내 주위에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들도 꽤 많지만, 그래도 대개 우울증을 티 내는 사람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해주며 속으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이러이러한 불안감이 있다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 힘들겠구나... 나도 집이 어릴 때 어려웠었지만 지금은 다 같이 힘내서 괜찮은 집에 살고 있고 나는 앞으로도 내가 잘 될 거 같은데, (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
그리고 이후로 만난 사람들 중 한 60%의 지인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거나, 긍정적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간과했다. 세상에 우울증 관련 책이나 콘텐츠가 꽤 많아서 우리나라에 우울증인 사람이 생각보다 엄청 많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내가 찾아봤기에 많은 것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 감정에 대해 무지한 사람도 굉장히 많았고 그저 돈 벌어먹고살기에만 바쁘고, 유흥이나 자극적인 유머에 시간과 돈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일시적인 우울감이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나도 저렇게 살았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 사람들도 속에선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지 아닌지 일일이 파악 못할 노릇이다. 그래서 내가 더욱 바보같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힘들든 안 힘들든 이렇게 각자 나름대로 계속 스트레스를 풀고 우울함과 거리를 두는데, 나는 오히려 불안해서 우울과 더 가까이 있었고 나만 세상이 이렇게 지옥 같은가 싶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위로에 상처 받았었다. " 사회생활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 , " 세상에 즐거운 게 이렇게 많은데 왜 그런 생각을 해? " 등등 조차도.
우울증을 인지하고 있다는 게, 과연 나에게 독일지 아닐지는 끝장을 봐야 알겠지만 난 내 죽음이 올 때까지 치료하기 위해 항상 내 우울을 발치에 두고 살기로 했다.
동기가 어쨌건 나는 변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다가 가끔씩 다시 깊은 우울에 빠지면 이유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너무 사라지고 싶어 진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희망들도 희미해지고 의지도 사라진다. 말이나 글로 적으면 어찌나 이렇게 감정 전달이 어려운지, 가벼워 보이지만 정말 본인이 느끼기엔 소름 끼치게 힘들다. 그리고 며칠 전에도 이 증상이 너무 급격하고 강하게 찾아왔고, 그때 들었던 생각이 있다.
" 어쩌면, 희망에 중독되어 속아 살아가는 게 아닐까 "
사람이 살아가는데 희망은 반드시 필요하다. 눈 앞에 보이는 희망이든 안 보이는 희망이든 그게 이름이 '희망' 이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생기기 때문이다. 희망에게 속아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통스럽게 보냈던가, 그걸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희망, 사랑, 믿음.. 이따위의 단어들이 모두 무섭고 두려워졌다.
그래, 우리 엄마 아빠도 오랜 시간이었지만 변했듯이, 정신 못 차리던 전 남자 친구가 나로 인해 변했었듯이, 최악의 환경에서 근무하다가 최고의 환경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듯이, 항상 희망이 끝에 있고 그렇기에 난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고 극복해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버린다. 심지어 반대로 안 좋은 결과였던 기억도 '그래도 ~'라는 첫 문장의 시작으로 합리화가 시작되고 그것을 다시 희망으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 희망이라는 것이, 고통과 같은 단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의미와 , 부정적인 의미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살아가야 한다면 희망에게 계속 속아주어야 한다. 즉 고통에게도 속아주어야 한다. 일시적인 상황과 순간들에 둘 중 어느 누구에게 어떻게든 속아주어야 시간이 지나간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희망에게 속아주어야 온전해지고 건강해진다. 그렇다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잠깐의 고통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에 굳이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서까지 피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희망에게 더 많이 속을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