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취미는 '낚시'입니다.
2026년 2월 12일 목요일
‘취미’라는 주제는 일상에서 흔하게 등장한다.
초면인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어색함을 풀기 위한 소재가 되고, 오래된 지인과의 대화에서는 근황을 나누는 통로가 된다. 호감이 있는 상대와는 공통점을 찾기 위한 질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사회복지학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다. 연구와 함께 사회복지사를 꿈꾸는 학생들과 배움을 나눈다.
사회복지는 대면 서비스라 불리고, 사회복지사는 생활상의 곤란함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하는 전문직이다.
일본의 사회복지사 양성 커리큘럼에는 Social Work Seminar라는 수업이 있다.
사회복지사로서 클라이언트를 마주할 때 필요한 전문 기술을 다룬다.
그 수업의 첫 번째 파트가 ‘자기 자각(self-awareness)’이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개념이지만, 자기 객관화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회복지사 양성 과정에서 자기 자각을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클라이언트의 상황에 과도하게 이입하거나 자신의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 투사하는 일은 전문직으로서 위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 사고방식, 호불호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이 어떠한 경위로 형성되었는지를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자기 자각은 쉽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그때 사용하는 학습 과제 중 하나가 ‘취미’다.
자신의 취미가 무엇인지, 그 취미가 형성된 배경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 환경적 요인은 없었는지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나 역시 그 과제를 학생들과 함께 수행한다.
부끄러운 순간이 있었다. 그 수업의 첫 시간이었다.
자기 자각의 중요성을 설명한 뒤 학생들에게 취미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과제를 주었다.
발표 시간이 되었지만 좀처럼 먼저 나서는 학생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 학생이 나에게 질문했다.
“교수님, 교수님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요? 제 취미는 낚시입니다.” 삼십 년 가까이 그렇게 말해 왔기 때문이다.
곧이어 질문이 이어졌다.
“자주 가시나요?”
이번에는 정적이 길었다. 나는 낚시를 가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한 낚시는 2016년 3월, 필리핀에서였다. 그전을 떠올려도 횟수는 손에 꼽힌다.
그럼에도 나는 어디에서든 나의 취미를 ‘낚시’라고 말한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취미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전문적인 일 외의 시간에 하는 활동이다. 사람들은 취미에 시간을 할애한다.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흔 해 인생 동안 내가 낚시를 한 횟수는 열 번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나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낚시를 취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수업을 마친 뒤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낚시는 언제부터 나의 취미가 되었을까.
기억의 끝에는 저수지 수면 위에 떠 있는 낚시찌가 있다.
그리고 그 찌를 말없이 바라보는 아버지, 그 곁에서 아버지를 흘깃거리던 나.
아버지는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손에 꼽힌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버지는 낚시에 빠지셨다.
주말마다 낚시터로 향했고 나를 두세 번 데리고 가신 적이 있다.
불편했다. 평소에도 대화가 거의 없던 사이였다.
저녁마다 이어지던 부모님의 다툼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남겼다.
낚시터의 시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낚시찌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취미는 낚시가 되었다.
전혀 하지도 않는 취미.
어떻게 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취미가 맞기는 한 걸까.
불편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아버지와의 단둘의 시간. 나는 그 관계가 불편했으면서도, 어쩌면 아버지와 무엇인가를 함께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화는 없었지만 같은 공간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었던 것 같다.
서로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은 내게 분명 ‘함께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전혀 하지도 않는 낚시가 나의 취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취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