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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호 Aug 22. 2021

나는 나이지만, 너는 너이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13장

모든 것이 한순간이었다. 땅 아래로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기뻐 벅차올라 구름 위를 걷는 것도, 무던히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평안하다 느끼는 기분 따위도 결국은 잠시 한순간이었다. 한치도 알 수 없이, 매초 매분 예상치 못한 일들로 나를 괴롭혔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은 나에게만 있는지, 왜 그렇게 서럽게도 매듭은 늦장을 부려 짓는지 원. (20200702, 내가 쓴 글)


‘자존적 편견’이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는 이 말을 '잘되면 내 덕, 못되면 남 탓, 조상 탓'이라고도 한다. 정의를 빌리자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성과가 좋은 일은 본인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성과가 나쁜 일은 다른 사람 또는 외부 환경의 탓이라고 판단하는 성향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존적 편견을 '귀인 오류'라고 말하는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타인의 성과가 못났을 때, 오히려 그 타인의 능력 부족으로 원인을 돌린다는 점이다.


"걔가 그거 안 된 이유는 걔가 열심히 안 해서야."

라고 말하는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이 편견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쉽다. 무너져버린 우리의 일을 우리 각자의 눈으로 해석하는 일은 그저 그들 자신이 아닌 외부의 무언가가 너무도 크게 휘몰아친다, 매번 애석하게도. 그러면서도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타인의 부족으로 귀속해버린다.


'나 이번에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공부를 못했어. 아쉽게 떨어졌지 뭐야'

‘근데 걔도 안됐대? 그럴 줄 알았어. 맨날 술 먹는 거 같드만. 그런 식으로 했는데 붙었으면 천운이지 뭐.’

뭐가 아쉽고, 뭘 그럴 줄 알았다는 건지 원, 진짜 내로남불이다.

*내로남불 :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의 줄임말


오랜 시간 속 우리는 그저 누군가를 우리의 잣대로 평가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되는데, 너는 안된다는 이유로, 나는 이런 이유들이 있는데, 너는 그런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런 이유 같지 않는 이유로, '네'가 '너'이기를 부정해왔었다.


이쯤에서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 말을 곱씹어본다. 결국 그건 타인의 인생에서는, 그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인생에서는 그만이 오롯이 그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인생에 참견할 권리가 없다. 아니, 참견이라는 말보다는 이래라저래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더 맞겠다. 어떨 때는 그가 정말 부족해서 못한 것이겠지만, 어떨 때는 그에게 놓여진 환경이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게 어떤 메커니즘을 가진 결과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그의 인생을 쓸 데 없이 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 잘되는 꼴을 왜 이렇게도 못 보는가. 그래도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우리들의 시선이나 마음이 조금은 유해 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아니 어쩌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정제되고 걸러져서 그런 유한 사람들만 내 옆을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 짓눌려 허우적대는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지 않았으니 저러지- 하며 혀를 차는 어르신들, 그리고 그 청년들이 자신들의 미래라고 생각하며 주입식으로 키워지는 아이들, 그 결과,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며 예쁜 말로 바꿀 줄 아는 한 평론가가 지은 비유어 같은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헬조선이 지금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제는 힘든 취업 또한 그저 당연히 힘든 취업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집을 사는 일이 그저 당연히 힘든 일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그래도 이 헬조선이 이제는 뭐 익숙해져서 '헬'까지는 아니지 않나 떠드는 국민들이 된 것이다.


정작 그렇지만 남 얘기는 빠질 수 없다. 본인의 일상을 떵떵거리며 사는 일과 타인의 일상을 헐뜯는 일이 왜 공존해야 하는가. 타인의 일상을 헐뜯는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을 때, 왜 그렇게 타인의 일상을 헐뜯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이런 용기가 났었다는 건, 아마도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겠지' 싶긴 하지만. 그리고 돌아오는 답변에서, '아니, 그냥 이야기한 것뿐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뒷 말은 들을 것도 없이, '아니'로 시작한 이 말이 가치롭지 않다는 프레임을 씌워버린다. 이것은 어쩌면 변명이라는 프레임에 대한 편견인 건가. 변명의 머리말은 보통 '아니'로 시작하니까 말이다.


아니, 그냥 이야기한 것은 무슨. 깎아내리고 싶었으면서, 그리고 그런 짓밟힌 그를 밟고 올라서고 싶은 거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자존감을 세우는 일인 것처럼 그런 혼자만 정의로운 일이라고 느끼고 싶은 거면서, 그러면서 정작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면 본인에게 주어진 수많은 여건과 상황을 풀어놓을 거면서...

'이런 자존적 편견 덩어리 같으니'


우리는 매초 매분 매시 매일 '우리'이길 바란다. 결국은 자존감의 노예들. 모순적이게도 자존감을 자존감으로 칭하는 순간 자존감의 노예가 된다. (한 문장에 자존감을 3번이나 쓰다니. 난 진정한 자존감의 노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참 하다가, 요즘은 '이런 답변에 대한 질문'을 나에게, 혹은 그 누군가에게 되묻곤 한다.


"난 나니까. 난 괜찮은 사람이야 - 근데 얘들아 이게 뭐가 중요한데?"


원래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였다. 너는 원래 너였고, 나도 원래 나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저 나는 나였다고.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목매달며 살고 있는 것인가. 진짜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찾지 않는 것에서 그 의미가 있는 법이다. 정말 자존감 있는 이들은 "자존감? 그게 뭔데?"라고 도리어 묻는다. 나도 나이길 원하고 너도 너이길 원하는 일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흘러가는 시간 속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면서.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 당신 다움을 찾을 시간에 그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당신다운 일을 하게 될 일'이다. 뚜렷하게 본인의 무언가를 집중하고 있지 않기에 본인의 시선이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 팔리게 되는 거다.

실패한 일에 내 부족인지, 운 부족인지, 상황의 악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다음번에 이번과 같은 실수는 안 하면 되는 일이다. 조금 더 신경 쓰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투자한 시간과 에너지는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그저 개인의 역량만 가지고 무언가를 성공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이를 터득한 사람은, 이런 거다. 굳이? 굳이 남의 부족함을 들춰내지 않는 거다. 그 사람이 한 노력이 얼마쯤 될지를 본인이 알기 때문에, 그 실패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 실패로 그 사람의 인생이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잠시 그 노력의 대가가 정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나이지만, 너는 너이기를 바란다는 말. 적당한 위로쯤이라면 썩 괜찮은 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당신의 마음속에 그득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 말은, 굳이 마음먹어야 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그런 유사한 종류의 마음을 품겠다 마음을 먹었다면, 나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그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주위 그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그 누군가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면, 함께 그 누군가를 위해주는 마음으로 무거우면서도 진득하면서도 꽤 괜찮은 관계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이,

그저 당신이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나도 나이지만, 너도 너이기를 바란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13장 끝.


이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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