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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호 Nov 03. 2020

많은 이들 중에서도 너와 ‘결’을 나란히 한다는 것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5장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남았다. 언제부터 그래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이런 게 당연스러운 일이라고 느낀다. 왔다가도 가고, 갔다가도 오는 그런 수없이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공중화장실이라도 된 듯 들락날락 그렇다. 이 와중에 느끼는 것은 우리는 "괜찮은 이들이 새로이, 그리고 더 많이 나에게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머무르던 괜찮은 이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무던히 노력할 것인가"를 두고 하는 저울질에 어느 정도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된 듯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굳이 마디마디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일,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의 방향을 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흘려보내는 일이 자연스럽다. 어렸을 때는 - 어리다고 해 봤자 불과 7~8년 전이고, 내가 제대로 사람 구실 하고, 누군가와의 "관계"라는 것을 정의하기 시작한 그즈음이다. - 내신과 수능 공부에 익숙했던 나이기에 인간관계에도 정답이 있는 것처럼 가장 가능성 있는 것에 '이게 맞다'라는 생각으로 인위적으로 마음을 주기도 했다. 무척 자연스럽지 않았다.


정말 맞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과 맞다고 단정 짓는가. 알고 지낸 시간으로 그와의 관계를 정의하는가, 만남의 빈도수로 정의하는가, 외모로 정의하는가, 라이프스타일로 정의하는가, 주량이 맞는 이들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좀 더 관계를 열어놓는가. 단 하나를 정해놓고 관계를 정의하기엔  그렇게 너와 나의 관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친구 어떤 친군데? 어떻게 아는 친군데? 우리에겐 이런 질문에 대해 ‘고등학교 친구’라는 답변을 하는 것이 참 쉬운 답변인 듯하다. 이 답변에 이미 정말 오래되고도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디폴트가 깔려버린다. 사실 나는 주변인들에게 흔히 하는 ‘나의 친한 친구에 대한 소개’의 서두를 ‘고등학교 친구’와 같은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그저께 만나 술을 한잔 기울였던 빵쟁이 친구에 관해 말하자면 이런 거다. (굳이 언급하자면 빵쟁이라는 단어는 베이커리 종사자를 비하하는 단어가 아니다. 나는 글쟁이다.)


“내 주변에서 빵에 대한 메시지가 가장 확실한,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흥미롭게 풀어내는, 그리고 몇 년간 가장 빠르게 깊어진 친구”


이쯤에서 ‘결’에 대해 말해본다. 내가 고등학교 친구를 ‘고등학교 친구’라고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 친구와 ‘고등학교 친구’이기에 인연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빵쟁이 저 친구는 굳이 ‘고등학교의 인연’이 아니었어도 나와 깊은 친구가 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결’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빵 선생 홍 씨는 다시 말해 나와 결이 잘 맞는 친구다.)


사람마다 울타리를 치는 곳과 방법은 각기 다르다. 친구 관계, 목표 설정, 생활 습관, 시간 관리 등. 울타리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을 어떤 중요한 타이밍에 긍정적으로 이해한 서로에 대해, 나는 ‘결’이 맞다고 표현한다. / 너와 나는 다르다. 근데도 요즘은 부쩍 비슷해지고 있다. 옷 입는 느낌, 삶에 대한 가치관, 서로를 위하는 마음. 결이 맞는다. / 울타리의 모양이 같을 수 없다. 내 울타리가 이런 형태니까 이해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을 비참하고 힘들게 한다. 중요한 타이밍을 만들기 위한 서로의 노력이 같은 방향의 결을 만든다. - 강요된 ‘결’이 되지 않기로 노력하기 #unpressurized (20191125 내가 쓴 글)


글쎄, 또 '결'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니 '결'이 무엇인지 딱히 표현할 말이 없네. 수많은 이들을 마주하고 다시 보낸 일이 익숙해졌음에도 정작 우리는 결 맞는 친구가 어떤 친구인지 딱히 표현할 수 없는 거다.

비슷한 대화를 얼마 전에 나누었다. 친해진지 고작 몇 개월인 친구지만, 적어도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은 자신의 일처럼 잘 들어주는 친구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도대체 우리에게 '결'은 무엇인지, 이렇게나 다른 성장 환경과 가치관을 가진 너와 내가 왜 결이 맞다고 느끼고 있는지.


그래서 내린 결론은 대충(?) 이런 거다.

"결국은 서로를 맞추는 방법이 맞는 것이 결이 맞는 것이다." - "너와 나는 다르기에, 각자를 표현하는 데 바쁘다." - "네가 어떤 모양이든지 간에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 "다른 둘이지만 너무 다르다고 느끼지 않도록 맞추는 중이다." - "그 맞춰가는 방식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 "결국은 서로를 맞추는 방법이 맞는 것이 결이 맞는 것이다."


결 맞지 않는 친구를 친구로 붙잡고 있느라 마음이 고생한다. 불쌍한 내 마음이 고생을 한다. 분명히 나와 다른 친구지만, '그와 함께했던 오랜 시간 때문에, 그와 함께했던 추억 때문에, 그가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 없는 신념 때문에, 그와 함께 만들었던 관계의 이름 때문에, 그와 함께 하고자 했던 미래를 무너뜨렸을 때 느낄 것으로 예상되는 두려움 때문에' (나와 맞추고 싶지도 않고 혹은 맞출 의향도 없고 혹은 맞추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그를 붙잡고 있느라 불쌍한 내 마음이 고생을 한다. 막상 돌아보면 결국 떠날 친구는 떠나버려 단순히 알고 지내는 지인으로 머물러 버렸는걸, 당시에는 그 친구 하나가 그렇게도 힘들게 한다. 한 치 앞 밖에 못 본다. 바보 같이.


적어도 내가 그 타협점을 맞출 의향이 있든가, 아니면 그가 맞출 의향이 있든가, 아니면 둘 다 있든가. 그리고 둘 다 있으면 '결'이다. 내가 잠시든 오랜 시간이든 찐한 관계 속에서 머무르다, 결국 그 관계가 얕아지게 된 것은 내가 지쳐 손을 놓아버리거나, 상대가 적절한 응대를 해주지 않았던 것들에서 왔었다. 어리석게도, 절절하게 관계를 정리했을 때는 늘 그들의 마음이 내 맘과 같을 거라 굳게 생각했던 때였다. 기분 좋을 때나 맞던 결이 기분 나쁠 때도 맞을 거라 생각했던 때였다. 맞출 의향이 둘 다 있는 결 맞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당신의 마음과 똑같을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길 바란다. (심지어 어머니까지도) '결'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이전에 '사람 사이'라는 단어가 있고, '사람 사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이전에 '나 자신'이라는 단어가 있다.


"와 너랑 나랑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지?"

아니. 다르다. 분명히 다르다. 당신의 마음과 똑같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길 바란다.

그 이전에, 이런 방식을 원한다.

"너랑 나는 서로를 정말 잘 맞추는 것 같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빠진 관계에서 느끼는 맞지 않는 결도 결국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르다는 자체에서 오는 인정, 그 인정으로부터 오는 상대에 대한 이해, 그 이해로부터 오는 너와 나의 결, 그리고 그 결을 오랜 시간 나란히 한다는 것. 유난히 많은 이들 중에서도 너와 ‘결’을 나란히 한다는 것. 그것은 행운 반, 노력 반, 함께 살아가는 인생의 원동력의 대부분, 바로 그것이다.


p.s. 관계에 힘든 이들이 계속해서 실수하는 것은 나 자신을 제대로 챙기지 않고,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힘들어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힘든 이들이 먼저 되어보길 바란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5장 끝.


이민호 드림

Instagram @min_how_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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