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6장
내가 가장 난감함을 느끼는 때는, '장난인데 뭘 그렇게 받아들여'라는 말을 맞닥뜨릴 때다. 아니 그럴 거면 나 지금부터 장난칠 거라고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오든가, 그런 게 아니면 어떨 때 장난인지 미리 설명이라도 해주든가. 내 정색한 표정에 억지 채색을 입히는 일이 나에게는 쉽지 않은데, 그렇기에 나는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편이긴 한데, 이런 나라는 걸 알면서 왜 나에게 예민하지 않길 요하는가.
글쎄. 내가 예민한 건가. 아니지, 우리가 예민한 건가. 늘 이렇게 무례함과 예민함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무례함은 예민한 사람을 못살게 굴고, 예민함은 무례한 사람을 못살게 군다. 적당한 예민함과 적당한 무례함은 이를 의미도 없이 당연히 지나갈 문제로 취급되곤 한다. (누구든 적당히 예민하거나, 적당히 무례하면 굳이 문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이상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자기들끼리만 해석한 철없는 '쿨함' 같은 것이었다. 이상(異常)하다는 말은, '절대 쿨하면 안 되는 것'을 '쿨함' 자체에만 초점을 두고 이해하는 데서 온다. 상대방과 몸과 마음이 부딪치면서 상대와의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차이를 교묘하게 이용해 관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뭐가 이렇게 예민해. 너랑 다른 걸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물론 나처럼 예민한 사람도 있듯이, 정말 둔해서 무례한 사람도 있다. 어떤 행동이 불러일으킬 기분 나쁜 감정을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이가 차면 찰 수록 이런 둔한 캐릭터는 내 주위에 없는 듯하다. 어쩌면 둔한 것도 어렸을 때나 있는 건가. (눈치와 같은 것이니, 남들과 부딪치며 눈칫밥을 20년 정도 먹었다면 그래도 앞으로는 잘 살만한 눈치는 생겼다고 봐야 하지 않나) 아니면 둔한 사람이기에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저 자신을 포기하고 혼자 끙끙 잘 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예민함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무례함을 무릅쓰겠다는 말이고,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일을 무릅쓰고 그 둔한 성격을 개선하든, 혼자 살아가든 둘 중 선택을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이다. - 물론 타고나는 방법도 있긴 하다. 진짜 진짜 드물게.
나도 쿨함을 가장한 왜곡된 관계에 구속되어, 내 예민함을 꾹꾹 숨겨온 시절이 있었다. 내 이해심이 그저 평균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내 이해심이 넓지 못함을 탓하고 미워한 시절이 있었다. 나도 나 자신이 좀 더 속 넓은 사람이고 싶으니까, 그리고 사랑받고 싶으니까, 누군가에게 좀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랑하는 사람인 듯, 지금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흔히 말하는 호구 같은 친구였던 거다. 그저 그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쿨함을 이용해 나의 배려가 조금씩 조금씩 당연한 일들이 되어 갔었다. 그저 그 모든 행동들은 내가 선택한 것들이니까. 네가 좋으니까 내가 선택한 것들이니까.
그러다 술에 취하면, 그 정과 소중함은 예민함이라는 단어를 이길 수 없다. (어쩌면 이게 진짜 진심이라는 말이다.) 그저 내가 해오던 것들에 대한 보상 심리가 내 뇌 속을 사로잡는다. 예민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냥 예민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해내는 모든 행동들에 이유와 감정을 싣는 버릇이 있다.
"내가 해온 것들에 대한 너의 리액션이 이렇단 말이야?"
그리고 이런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렇게.
"뭐가 이렇게 예민해. 너랑 다른 걸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본인의 무례함을 상대방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마라. 괜히 미안한 감정 가지게도 하지 마라. 맞춰가는 인생 상대방이랑은 안 맞는다고 언급하지 마라. 은근 기분 나쁘니까. - 인간관계 잘하는 척하지 마라 #relationship (20191030 내가 쓴 글.)
작년쯤인가, 재작년쯤인가. 내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꼈던 이와 연을 끊었던 일이 있다. 그런 일 때문인지, 사람과의 관계를 잘해오고 있다고 느끼던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다시는 누군가와의 깊은 관계를 그리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잘못을 나 자신에게 돌렸다. 그래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 그때 그 시간, 나만 세상이 일천만 배는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그 시간에도, 나는 예민하게 저자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관계를 직면하는 방법은 고수하고,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변했다. 우리의 예민함은 우리가 아닌 이들에게는 없는 뛰어난 통찰력이다. 예민한 내가 직면하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나는 적어도 상대보다 더욱 후회 없이 상대에게 충실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예민함을 상대에게 터놓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 "적당히 무례하시는 게 좋을걸요."
온전히 나의 성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상대와 공유하는 일 자체가, 무례한 상대를 무례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모든 무례함을 해소시키거나, 모든 무례함에 거뜬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무례한 일을 맞닥뜨리는 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과 '결' 맞는 사람을 남겨 놓는 관계를 바라보는 변화된 관점을 무의식적으로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근데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지금 내가 오히려 "나의 예민함을 너의 무례함으로 치부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니야..)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저 자신이 예민하다고 꾹꾹 참으며 살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은 예민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꼼꼼히 타인을 챙기고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당신은 그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많이 사랑받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은 무례한 사람이 무례하다는 사실을 가장 빨리 인식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예민한 이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와 자격이 있다.
당신은 상대의 무례함으로 본인의 예민함을 침해받을 어떠한 이유가 없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6장 끝.
이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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