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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호 Oct 07. 2020

아무도 될 필요가 없는 데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4장

이것은 지금 당장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 아니다. 개인마다 제각기 다른 '제자리'가 있음을 꼬집고 싶은 내 마음을 풀어낸 글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쓸데없는 욕심으로 무엇이든 되려고 아등바등 사는 이들이 내 주변엔 꼭 있었다.


아무개로 태어나 아무개로 살다가 아무개로 죽는 사람이 숱하다. 어차피 77억 9십만 전 세계 인구 중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3자리 수가 되지 않는다.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말은 나와 살결이 부딪치는 일, 나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주는 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이해하고 사람대접 정도는 해주는 일, 이런 일들을 해오고 있는 이들이 나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떠한 계기로 자신이 이름을 날리든 얼굴을 알리든 '노력'이라는 형태의 것들로, 그 '무엇'이든지 되는 일이 드물기에, '아무개'라는 말이 왜 아무개인지, (수많은 이들에게 디폴트인 이 말이) 20대 끝자락에의 지금 나에게, '이제야 이해가 되는 말' 같은 게 된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꾸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강요한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대학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장래희망을 매년 매 반기 매월 빈 종이에, 아니 그렇게도 투박했던 네모 형태의 빈칸에, 나의 경우는 어머니의 힘을 빌려, 족히 10년, 20년은 지나서야 될, 그 장래희망을 적어내야 했다. 마치 그 장래희망이라는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을 강요받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의 나는 내가 써온 수많은 장래희망을 실천하지 못했다.


‘MBC 나 혼자 산다’에 배우 유아인이 나왔었다. (몇 년이 지났을 때쯤 이 TV 프로그램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이따금씩 푸념이나 사색에 빠져 멍해있는 그를 보면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그랬다. 가지고 싶은 것들을 다 가지고,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할 수 있게 되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만한 명예와 이름을 가지게 되니,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허탈하다고 하더라.


몸뚱아리는 하나인데 왜 그렇게 많은 게 필요했을까 발은 땅에 붙었는데 왜 그렇게 높은 곳이 필요했을까 해봐야 고만고만한 몸집에 (20200704 유아인이 쓴 글 ‘MBC 나 혼자 산다’에서)


왜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하나뿐인 몸뚱아리에 지나친 힘을 들이는가. 왜 그렇게 높은 곳이 필요했을까. 해봐야 고만고만한 몸집인걸, 왜 그렇게 크고자 했는가.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작가'도 어불성설이다. 뜨끔한다. 저 자신에 대해 왜 이리도 가혹한지 매분 매초를 조바심을 가지고 쓰고 있다. 그 보이지도 않는 '무엇'이 되고자 아득바득 몸뚱아리를 고문하는 중이다.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도 높은 곳을 원하기에 이렇게.


요즘은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 지금에서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때는 왜 그리도 절절했는지.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했던 이들은 다 알겠지만, 나는 정말 지독하게 공부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 줄 아는 것이 공부밖에 없었다. 성적을 잘 받는 일이 내가 잘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지금도 벼락치기에 소질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 암기를 밥 먹듯이 했던 짬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다 지나고 난 지금, 시험 첫날 가채점을 하고서 3과목 통틀어 4개나 틀렸다고 엉엉 울던(4개 밖에 안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중학교 1학년 첫 시험 그날을 떠올린다. 그때는 왜 그리도 절절했는지.


그리고 다시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에서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때는 '아무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 지금 나는 새로운 무언가, 새로운 '아무것'을 위해 절절하다. 그 시절과 다른 점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나에 맞춰진 '아무개'인 거다. 과거의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밤잠을 줄여 깨어 있는가,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가"에 대한 초점이 어쩌면 그 아무개에 대해 논하는 '타인'에게 있었던 거다. 그때는 왜 그리도 절절했는지, 결론은 '남'들을 위했기 때문이다.



- 매일 나와 술은 같이 먹었던 것 같은데 삼성에 턱 붙어버린 대학 동기를 보며 품게 된 기대감 혹은 부러움, 늘 칭찬하고 믿어주신 부모님의 지원에 부응하는 부담감 혹은 등쌀, 나와는 별 다를 게 없다고 느끼는 수많은 자기 개발서에 나오는 저자들로부터 받는 헛된 희망감 혹은 깨달음, 마음속으로 늘 품고 있는 성공에 대한 열망 혹은 허영심, 어려서부터 써왔던 장래희망 칸에 훌륭한 사람들만 써냈던 본인의 습관에서 오는 선입관 혹은 기대감, 일 년에 두서 번 명절이나 공휴일에 친지들이 모여 덕담이라고 해주신 '커서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와 같은 말에서 오는 수용하기 힘든 압박감 혹은 당연함... -



이런 유사한 느낌과 감정,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오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해방하길 바란다. 번듯한 영양사로 일하다가 진취적인 영업사원으로 전향해 재밌게 일한다는 사랑하는 형님(1살 형)의 이야기처럼, '그게 될까?'라는 수많은 걱정과 질타를 듣고도 꿋꿋이 친구들과 와디즈로 펀딩을 시작한 대전에 사는 찐친(3살 동생)의 이야기처럼, 한시도 가만히 다니지 못하고 수백 번 이직하는 프로 이직러 이 작가(본인)의 이야기처럼, 오늘 그저 해가 떠서 눈을 뜨는 일처럼, 그저 해가 져서 내 눈을 감는 일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저 자신에게 딱 맞는 제자리가 온다. 그렇기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조급하지 않고, 꾸준히 나에 대해 고민하길 바란다. 그 누군가가 원하는, 평가하는, 이끄는 그 어떤 '아무'도 될 필요가 없는 데에는 아무 이유도 없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드는 흔하디 흔한 행복한 '아무개'가 되기를 바란다.

특히, 이 글을 읽는 20대 청춘들, 취업이 힘든 이유가 정말 일하기 힘들어서인지, 남들이 보는 나의 기대치를 낮추기 힘들어서인지, 저 자신의 제자리가 맞는지 가슴 깊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말해보자면] 4장 끝.


이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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