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100일의 긍정에 대하여], 30일 차

by 이민호

이번 해를 그저 보내는 일이, 그리고 다음 해을 그저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다. 기필코 해내겠다던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나는 왜 그저 해내지 못했는가, 그리고 어제의 그 기운보다 내년인 오늘이 더욱이 그것들을 붙잡을 힘이 부족해짐을 직감으로 느낀다. 비단 내 몸의 변화뿐은 아니다. 함께하는 이들의 이야깃거리에 귀가 더 커지고, 내가 봐 오는 많은 글과 영상들에 몸과 마음이 저려온다. 그것이 새롭기 때문에 눈이 갔던 어제의 나와는 달리, 이제는 작은 것들에도 감사하며 지나가는 내년 일지어다.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강한 잡초 같았던 어제였다면, 이 정도면 잘했다며 우쭈쭈 하는 오늘이다.


어제는 여러모로 일이 많았던 날이다. 그 끝에는 사랑하는 친구들 문 모씨와 김 모씨가 있었다. 감사하다. 오전 반차를 쓰고 오후 2시에 출근한 나는 그이들과 2020년 마지막 태양이 지는 모습을 보겠노라며 2시간 근무를 끝으로 조퇴를 했다. (대체 이럴 거면 회사는 왜 나간 거야.) 덕분에 처음으로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봤던 현대차 베뉴를 타봤다. 스피커가 빵빵하다는 기억으로 가득하다. 태양을 보러 가는 길 내내 재즈풍의 노래들을 계속 들었는데, 낮은 음조까지 고즈넉하게 귓속을 때렸다.


구름이 장관이었다. 태양이 가라앉기 5분 전쯤 구름들에 걸린 태양을 보며 마지막 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았다며, 마치 태양 본인이 우리의 마지막 날을 기념해주듯 멋들어진 경치를 만들어줬다. 좋았다.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해가 지는 시간은 마치 타임세일 같아서 반짝 보여주고 반짝 사라지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고. 이렇게나 시간이 빠르다고.


나는 친구들에게 내년 계획을 물었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내년에도 바디 프로필을 찍느냐고, 내년에도 20대의 마지막이라는 핑계로 올해 했던 것들처럼 30대의 처음이라는 핑계로 무엇을 해댈 것이냐며, 그런 계획들을 물었다. 한동안은 레슬링과 수영으로 이야기가 핫했다. 힘들게 시작해서 재미로 끝나는 스포츠가 수영이라며,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다 문득 앞자리 바뀐 우리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했다고 스물하고 10년을 이렇게 날렸는가. 이제 우리는 꼰대들이라며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들을 해대며 웃어넘겼다. 문 모 양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년의 시작을 잘 해내자, 서른의 시작을 잘 해내자, 서른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자, 무엇이든 기분 좋게 첫 해를 채워보자"


아직 서른이 한참 남았다는 김 모 군은 불쌍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저 무엇이든 해내자는 그 말에 그저 동의하기엔, 아직은 흘러가는 시간에 어떤 가치관을 담기엔 그다지 유념하지는 않은 듯하다. 무덤덤, 그런 느낌인 건가. 아무튼 어제의 나 또한 오늘부터 시작하는 또 다른 올해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잘 해내길 바라고 있었다. 2020년 마지막 날의 바람이란, 수많은 방향으로 불어올 찬 바람에도 꿋꿋이 계획한 것들을 이루겠노라는 그런 바람인 거다. 여느 때와 같은 연말의 다짐, 그리고 연초의 계획이겠지만, 매년 다잡는 마음처럼 올해만은 다를 것이리라. 점점 더 힘들어지기에 다른 모양이겠지만, 그래도 올해만은 바라리라. 그렇게 어제는 생각했었다.


30일 차의 어제, 연말을 보내는 마지막 태양은 금세 우리를 버려두고 가라앉았고, 30일 차의 오늘, 새롭게 뜬 첫 태양도 하릴없이 금세 가라앉는 듯하여 나는 그저 첫걸음이 작년과 같은 헛걸음일까 두려워하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