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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Oct 02. 2020

여러분만의 공간을 갖고 있나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적인 공간을 뜻하는 독일어, '슈필라움'

어릴 적부터 내 꿈은 내 방을 갖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5년 전까지만 해도 살면서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썩 넉넉하지 못했다. 언니랑 방을 늘 같이 썼었는데, 사춘기가 지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퍽 불편한 점이 많이 생겼다. 일단 집에서 남자 친구랑 통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한 명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 옆에서 밤늦게까지 통화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문제로 언니랑 몇 번이나 큰 싸움이 나기도 했었다.


5년 전, 나와 방을 함께 쓰던 우리 언니가 시집을 갔고, 드디어 스물일곱에 혼자 방을 쓰게 되었다. 내 세상일 것만 같았던 방은 그럼에도 여전히 작게 느껴졌다. 이 좁은 방에서 어떻게 두 명이 살았나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방의 평수가 작은 것도 있겠지만 내가 커버린 탓일 거다. 


그러다 얼마 전 자취를 시작하면서 완벽한 내 공간이 생겨났다. 이 얼마나 꿈에 그리던 일인가!


나만의 공간이 생기면 오늘의 집 같은 인테리어 앱에 나오는 방처럼 예쁘게 꾸밀 거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막상 비싼 월세를 감당하며 살다 보니, 방을 꾸미는 건 사치로 느껴졌다. 관심 아이템에 넣어놨던 예쁜 조명들, 느낌 있는 액자, 원형 테이블은 아직 장바구니로 넘어오지 못했다. 대신 꼭 필요한 물건은 당근 마켓을 통해 최대한 저렴하게 구매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공간이 너무 좋다. 밤늦게까지 눈치 안 보고 통화를 할 수 있고, 맘껏 자도 깨우는 사람 없고, 가끔은 시원하게 펑펑 울 수도 있는 이 공간이 너무 좋다. 꿈꿔왔던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는 아닐지라도 알파벳 필기체로 'hello'라고 쓰인 핑크색 네온사인 조명 하나면 충분하다. 언젠가부터 유독 네온사인을 좋아하게 됐는데, 이 작고 화려한 불빛은 내 자취방의 유일한 사치품이다.



얼마 전 '공간'에 대한 책을 읽었다. 바로 김정운 작가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이다. 그는 전 교수이자, 작가이자, 화가이다. (한 가지도 어려울 것 같은데, 정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나는 이 작가를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됐고, 유쾌한 글솜씨에 반해 신작이 나오자마자 구매를 했던 기억이 난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이 책을 다시 열어본 이유는 이 책이 '공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그는 여수라는 낯선 곳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했는데, 바닷가를 바로 마주하고 있는 낡은 미역 창고이다. 이 미역 창고를 개조해 본인의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작품 활동에 대한 영감을 받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냄새를 맡으며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다. 그러면서 개인만의 공간인 '슈필라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슈필라움은(Spielraum) 독일어인데, 우리말로 '여유 공간' 즉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이라고 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이다. 책에서 그는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내 '슈필라움'이다."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언니랑 함께 보냈던 내 방에서 왜 나는 안락함을 느낄 수 없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돌이켜보면 분명 물리적 공간은 있었지만, 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심리적인 여유나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건 언니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한 명이 자겠다고 불을 끄면 다른 한 명이 아직 잘 준비가 안되어있어도 침대에 억지로 누워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나는 아직 한창인데 상대가 졸리다고 눈치를 주기 시작하면 이건 재앙이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오는 핸드폰 불빛도 엄청난 민폐였기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춘기의 대부분을 보냈던 그 공간에서, 아쉽게도 독립된 개체로서 '자의식'을 형성해나갈 수 있는 기회는 적었던 것 같다. 


뒤늦게 나 혼자 오롯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선물 받았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서울살이라서, 혹은 자취라서 이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냐고 묻는대도 어쩔 수 없다. 내겐 너무 특별한 시간들이다. 서울살이를 시작한 뒤로 아침 운동을 시작했고,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글도 쓰고 있다. 훗날 이 시간을 돌이 켜봤을 때 '나만의 공간에서 보냈던 이 순간이 참 좋았고, 또 많은 영감들을 받아서 안 하던 것들을 생전 처음 도전해보게 됐다'라고 기억하고 싶다.


나는 내가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롭다기 보단 '나'를 더 이해하고 나와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도 알아가는 것 같다. 언젠가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내가 사는 곳은 나만의 공간이 아닌 우리의 공간이 되겠지? 이 순간을 그리워는 하되 덜 즐겼다는 후회는 하지 않도록 오늘도 하루 4만 원씩 내고 있는 이 서울살이를 온전히 누려야지!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공간을 갖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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