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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살 어른이 Apr 29. 2021

14화. 아직 읽어주지 못한 위인전

일본인 아내와 사는 한국 남자의 솔직한 이야기

7살 딸아이의 유치원 프로그램 중 <기자 발표>란 것이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폼보드에 내용을 정리해 친구들에게 발표를 하는 수업이다. 이번 <기자 발표> 주제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다. 유치원 알림장에 적힌 기자 발표의 주제를 보고 아내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조심스레 선생님께 보내는 유치원 노트에 서투른 한글로 이런 편지를 썼다. 

우리 딸은 한국과 일본 혼혈이고 이중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혹시 역사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 일본에 대한 안 좋은 인식 때문에 딸이 상처를 받거나 친구들한테 안 좋은 말을 들을까 봐 걱정입니다. 지금은 국제화된 사회에서 평화롭게 한일 관계가 좋아지고 있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저희의 희망입니다.

# 언젠가는 겪어야 할(?) 딸의 시련이지만...

기어코 올 것이 왔다. 이런 고민을 할 날이 언젠가 올 거라 예상했지만, 유치원 때부터일 줄은 몰랐다. 아내는 일본인이라 아무래도 나보다 더 고민이 컸었나 보다. 유치원 선생님한테 그런 편지까지 썼으니 말이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박물관을 갔는데, 유물을 설명하던 학예사가 일본에 대한 욕을 심하게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아내는 다른 것에 정신 팔려 그 욕을 듣지 못했지만, 유물을 관람하던 내내 나는 학예사가 또 일본 욕을 할 까 노심초사 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니 별 개의치 않는다 다. (진짜 속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경험이 꽤 있었나 보다.

아내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전철을 타고 있는데 궂게 생긴 할아버지가 옆에 앉더니 대뜸 "독도는 누구 땅이냐?"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하는데, 짓궂은 학생 역시 "독도는 누구 땅이라 생각하냐고 물어보곤 한다고 한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아온 아내는 그럴 때마다 한국말을 못 하는 척하거나 "독도는 내 땅이 아니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곤 한다. 이런 아내도 정작 그 대상이 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 10년을 함께 했지만, 역사 얘기는 아직...

혼자 극장을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보고 싶은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보는 경우가 있다. '명랑', '봉오동 전투'는 아내 없이 혼자서 본 영화다. 영화를 볼 때면 중고등학교 시절 부모님 몰래 성인영화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끔 주변에서는 그럴수록 같이 봐야 한다고 하지만, 나와 같은 다문화 가정을 꾸린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도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공감하기 힘들 거다.

# 기자 발표 주제는 무엇으로 할까?

기자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딸의 손을 잡고 서점을 향했다. 7살 아이가 읽을만한 위인전을 찾는데 아이는 엄마, 아빠의 이런 고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노래를 부른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마침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에 대한 위인전을 찾았다. 집에 돌아와 딸이랑 책을 읽는데 삼국시대까지 나오는 앞부분만 위주로 읽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임진왜란과 일제 시대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 아이를 믿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면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엄마, 아빠의 국제결혼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우리 딸이 only 한국인으로 성장하길 바라지 않는다. 반은 한국인, 반은 일본인으로 살았으면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 모두를 이해하는 현명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솔직히 아직은 머릿속이 하얗다.  아내는 가끔 차라리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3의 국가로 이민 갈까? 란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하기도 한다


 친구는 조언을 한다. 바보 같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바보 같은 상황이 되어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똑똑할 거라고. 그러니 아이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아이들을 그냥 믿기만 하는 것도 바보 같은 어른들의 무책임한 행동은 아닐까?


그럼에도 아직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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