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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Oct 23. 2019

반팔순을 앞두고 반자발적 퇴사를 했다.

반팔순을 앞두고 반자발적 퇴사를 했다.

우선 이미 반팔순을 넘었거나 진짜 팔순이신 분들께는 불편한 단어일 수도 있겠다. 그저 세월이 가는 것에 순응하고자 하는 이의 귀여운(;) 언어라고 이해해주시길.
국내용 국외용으로 구분해 나이를 계산하는 것은 단연코 나만의 습관은 아니다. 어학연수 10개월을 제외하더라도 기회만 되면 해외로 나가 장기거주를 꿈꿔온 것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생일이 안 지났으니 1살을 빼야 한다거나 이제는 만으로 나이를 계산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요구되는 방향이라며 기어코 나이 계산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사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나이고, 감바리같이 나이로 뭘 속여먹을 것도 아닌데 뭣이 중할까.
언제가 부터는 한 살이 더 많든 적든 어차피 먹은 나이이고 딱히 상대의 나이가 몇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굳이 나의 개인 정보를 주절주절 나열하는 것도 귀찮게 될 때 즈음, 그냥 곧 반팔순(반 80=마흔 40)이 된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반고흐(35)보다 덜 위트 있고, 진정 눈 깜짝할 새 그 '곧'도 어느덧 내년이 되었다는 것은 좀 씁쓸하긴 하지만 말이다.

퇴사를 앞두고 있던 지난 5월 나의 상태를 담은 일상툰

아무튼 나이는 여기까지 정리하고, '반자발적' 퇴사에 대해서도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 나의 경력사항에 대해선 심플하면서도 복잡한, 그야말로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는데 내 과거를 나름 잘 알고 있는 절친의 의견에 따르면 "넌 역마살이 있어. 그 일을 잘하고 평가도 좋고 계속 오퍼가 들어올지라도 너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꾸역꾸역 일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맞지 않으니 계속 그만둘 수밖에.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 진정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해, "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으나 대충 이런 이야기들이다.)

다시 말해, 난 분명 나름 계획 하에 업무를 발전시키는 스텝을 밟으며 전문성을 키워가고 있지만(있다고 믿고 있으나) 사실 그냥저냥 하고 있던 일들을 하고는 있는 것뿐이다. 서류-필기-면접-면접-면접으로 어렵게 들어간, 어쩌면 내 업무 인생의 종착역(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생각한 곳에 입사하자마자 매일 밤 나의 선택을 자책하며 울며 지내다 4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한 이후로 사실 똥밭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당시 학업 중이었고 오며 가며 나를 불쌍히 여긴 이들이 불러준 프로젝트들로 '프리랜서'라는 허울을 둘러쓰고 있었지만 사실 이제야말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 때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일한 분야에서 벗어나 진정 원하는 분야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배운 것, 해온 것은 가지고 가되 내가 원하는 분야라면 더 가치 있고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노무 '유사업종', '동종업계' 경력 때문에 이직의 벽은 높았고, 고민을 하던 중 학업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알았던, 무의미한 고학력은 종이 쪼가리만 남겼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던 그때, 나의 상태를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의 추천으로 난 내가 여태껏 일해온 '동종업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 딱 1년만, 이 또한 내게 기회가 되리라 생각하며 '계약직'이 되었다. 육아휴직을 들어간 직원을 대체하는 업무였는데, 나도 짬밥이 있지 내가 일 하는 동안에는 오롯이 내 업무라고 생각하며 일했다. 어차피 1년이니까 가능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 암튼 입사 첫날부터 달력에 d-364을 체크하며 이 1년 동안은 흠잡을 것 없이 잘 해내고 나가야지 싶었다. d-200, d-100, d-50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시간은 더디갔고, 나만의 축하파티를 하며 일찍부터 계획했던 핀란드행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했다.

그러던 중...  회사의 육아휴직 기간이 노사합의로 1년에서 3년으로 늘어나면서 계약직의 연장을 제안받았다. 개인적으로 정규직으로도 계약직으로도 일하면서, 내가 이 일을 평생 할 것도 아니고 어떤 고용조건이라 하더라도 내가 내일만 열심히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계약직에 대한 불만은 크게 있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대직자로서 그 한계는 분명했고 내가 최선을 다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한들 조직 내에서 내게 줄 수 있는 베네핏은 한정되어 있음은 분명했다.

출근 혹은 퇴근과 함께 퇴사전의 정신상태를 그림으로 기록했다.

몇 주간 수차례에 걸쳐 팀장의 회유가 시작했다. 그는 나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확답도 줄 수 없지만 나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했고 같이 일해주길 바랬다. 나 역시 팀장과 팀원들 모두 함께 일하기에 (약간의 양념을 쳐서 말하자면) 완벽한 팀이었고, 매사 적극적이고 팀원 케어는 물론 자신의 커리어도 잘 관리하는 팀장에 대한 의리 때문에 마음이 좀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난 육아휴직 대체자일뿐이고 이 자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나는 나갈 사람이고 그게 올해인지 내년인지, 내가 한 살 더 먹고 이 고민을 또 해야 할지 지금 다른 미래를 계획해야 할 지 문제였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디데이가 왔고 바로 4일 뒤 휘비휘바의 나라 핀란드로 떠났다.


근데 이 얘기는 2018년 3월의 이야기다. 2019년 10월에 이 이야기를 뇌까리는가 하면, 앞선 스토리가 작년 7월부터 반복되었고, 올 7월 다시 반자발적 퇴사를 함으로써 진정 마지막 점을 찍은 것이다. 달포 동안은 조바심이 좀 났지만 실업급여를 신청하며 나의 미래를 계획적으로 그려보려 했고, 또 달포 동안은 내 상황과 하고자 그려온 일들이 마뜩하지 않아 자꾸만 현실을 에돌았다. 가납사니 같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으려 애써 노는 게 딱 적성이었더라~ 하곤 했는데, 점점 더 적성 찾기는 절망이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고 예전엔 서울이며 근교 곳곳을 돌아다니기라도 했는데 이젠 어디 가도 흠, 뭘 해도 흠, 흥미도 없고 기운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반팔순 반자발적 퇴사자는 과연 경단자에서 벗어날 것인가. 그 뒷 이야기는 콤윙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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