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짧은 글 - 30일 차
무기력이 이어지면서 퇴근 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집안이 먼지로 덮이고, 모든 컵과 텀블러가 싱크대에 쌓여 더 이상 새 컵이 없을 때까지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모든 것을 미뤄둡니다. 이 모습을 부모님이 보신다면 “이러려고 독립했냐”라고 하실까요, 아님 “이 꼴 안 보니 속 시원하다”라고 하실까요? 분리수거도 3주나 밀렸는데 말이죠.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요즘입니다.
사라진 것은 일에 대한 에너지만이 아닙니다. 정말 싫은 그 사람과 더 이상 감정적 교류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삶이 냉소로 얼어붙은 것만 같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도 없고, 어쩌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없으니 효능감은 바닥이고요. 번아웃이 이제 제 삶을 파고드는 기분이에요. 한동안 꾸역꾸역 끌어올린 삶의 궤도가 다시 무너져 우주 한복판에 떨어진 것만 같거든요.
이런 기분과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아요. 저와 같은 이들도 꽤 많은 듯하거든요. 이건 단순히 나약함의 문제가 아닌, 에너지가 진짜 다 쓰인 것뿐이니까요. “삶의 어느 시점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자발성, 살아있다는 느낌, 혹은 생생한 실제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고,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는 쇼를 그럭저럭 해내는 환자에게서 더 심각한 감정상의 문제를 보았다. 이런 환자는 내면에 비어 있는 느낌, 죽어 있는 느낌, 거짓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콧은 인간의 내면을 진짜 자아와 거짓 자아의 개념으로 제시했는데요. 내면에서 우러나는 본연의 자아와 외부의 기대나 요구에 맞추려고 만들어진 방어적 자아가 그것이죠. 사회생활에 있어서 거짓 자아가 필요할 때가 참 많은데, 이게 너무 강화하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결국 내면의 공허함, 죽은 느낌, 심리적 에너지 고갈로 인해 무기력에 빠지는 거죠.
거짓 자아를 해체하고 진짜 자아로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지금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요. 조금이라도 뭔가 할 수 있게 되면, 단 한 줄이라도 일기를 쓴다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좋아요. 사실 믿을만한 선배나 동료, 멘토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담을 받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지만, 여기까지 나아가기도 힘들거든요. 그럼에도 진짜 조금 더 할 수 있게 되면, 전시도 보고 야구도 보고 나가서 따릉이도 타고, 지겹게 보았던 숏폼 트렌드에 대해 친구와 수다라도 나누세요. 엄청난 변화를 만들기보단, 그저 조금이라도 현실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뭔가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그 무엇보다도 인내심을 갖고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니, 불안하고 또 자괴감도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비난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지금 절 가장 응원하고 믿어줘야 할 사람도 저인듯해요. 퇴근 후 옷도 안 벗고 소파에 누웠지만,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내게 칭찬의 한마디, 겨우 몸을 일으켜 던져놓았던 옷가지들을 옷걸이에 대충 걸어놓은 것도 칭찬, 물컵이 없어 결국 설거지를 한 것도 칭찬. 스스로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세요. 이 무기력에서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길 바라며, 매일매일 짧은 글, 30일 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