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약속도 생길, 점심시간

매일매일 짧은 글 - 31일 차

by Natasha

콘퍼런스에 다녀왔어요. 강연자와 주제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 오늘 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외부교육이나 출장, 연차 등의 개인 일정이 있을 때 각자 회의자료에 적곤 하는데요, 이번엔 팀리더가 굳이 업무공백이라는 별도의 칸을 만들어 써넣은 이유를 모르겠어요. 업무 연락을 안 하겠다는 의미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땡큐. 하지만 이래저래 오늘 단 두 명만이 출근했다니, 부디 숨 막히는 시간이 아니었길 바랍니다.


왜 강연자들은 시간을 못 맞출까요?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조금씩 밀려 결국 점심시간이 줄었어요. 이 수많은 사람들의 줄 서기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잽싸게 식당을 고르고 줄을 섰습니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중요한 보고서의 커버를 만드는 일과 같아요. 신중하고 전략적이어야 하죠. 주어진 시간은 단 1시간. 단순히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닌, 오전에 고생했고 오후에 고생할 나를 위한 보상의 시간이자, 잠시의 해방과 일탈의 시간이에요. 사실 메뉴를 고민할 때부터 평화는 없어요. ‘뭐 먹지?’ 고민은 루틴이죠. 그나마 오늘 같이 사무실 근처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 오면 굉장히 리프레쉬한 메뉴 선택이 가능해지죠.


점심시간은 눈치로 무장한 외교전쟁이기도 해요. 무턱대고 날아드는 팀리더의 “점약 없는 분? “, 없던 약속도 생길 판이죠. 왜 팀리더는 외부 미팅도 없고, 다른 팀리더들과 점약도 없는 건가요. 사실 그분의 입사 초기, 저의 외부 점심미팅에 동석했다가 말실수를 너무 많이 해 너무도 곤란했던 적이 있었어요. 앞에서 실수를 정정하기엔 또 팀리더를 까는 게 되니 부디 상대가 의심을 품지 않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기를 바랐죠. 그뒤로 전 함께 점심 미팅을 잡지 않고요.


하지만 두어 달에 한 번씩 팀원의 생일이 있는 달에는 함께 먹기도 합니다. ‘난 아무거나’부터 ’ 무조건 고기‘ 또는 ‘에이~ 그걸 점심에 먹는다고?‘, 말이 길어지기 전에 빠르게 메뉴 정해요. ‘뭘 먹지?’ 매번 고민이라면, 제가 꿀팁을 슬쩍 공개할게요. 우선, 먼저 해둘 게 있어요. 바로 식당 리스트를 만들 것! 사무실 근처인 식당과 약간 떨어져 있지만 갈만한 곳, 택시 타고 5분 컷 번화가까지 가게명과 메뉴를 최소 5개씩 업데이트해두세요. 그리곤 네이버에서 룰렛 돌리기나 사다리 타기를 해서 무조건 정해진 곳으로 군말 없이 가는 거죠. (종종 한번 더 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3초 안에 떠오른 메뉴를 오늘의 운명적인 점메로 정하는 거죠. 언젠가 갑자기 숯불 닭갈비가 떠오른 적이 있었는데요. 물론 회사 근처에 이런 식당이 있을 리가 없었죠. 후다닥 검색을 해서 호롤롤로 택시를 잡아탔던 적도 있어요. 여기서 절대로! ‘신입이니까 ‘, ‘막내니까 ‘ 정해보란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뭘 먹을지 모르겠는 건 다 똑같거든요. 그냥 생각나는 사람이 말하기로 해요.


하지만 제가 선호하는 점심은 그냥 우리끼리 근처 공원에서 도시락을 나눠 먹는 거예요. 제가 어딘가에서 ’ 우리나라에서 포틀럭 파티가 안 되는 이유’를 봤는데, 네 명이 모이면 각자 1인분씩 자기 먹을 것을 챙겨 와 나눠 먹어야 하는데, 모두가 자기가 싸 온 음식을 모두가 맛봐야 하니까 4인분씩 싸 오는 바람에 16인분이 되기 때문이라더군요. 그러고 보니 매번 음식이 넘쳐나 다른 팀 직원분들도 초대해 함께 먹었어요. 점심파티에 초대된 모두가 우리 팀의 분위기에 반해 팀에 결원이 없는지, 우리 팀으로 이동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자주 했는데, 팀리더의 인성이 밝혀지고 나니 내부채용이 나와도 묻지를 않네요.


물론 가끔은 혼밥도 좋은데, 재택근무를 하는 날엔 빼박 혼밥이긴 해요. 사실 점심의 메뉴 고민은 핑계 같기도 합니다. 진짜 중요한 건 그 시간 자체니까요. 동료와 함께 음식을 나눠 먹고, 요즘 유행하는 밈과 챌린지로 수다를 떨며 웃고, 잠깐 짬을 내 회사 근처를 한 바퀴 산책하며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죠. 그 짧은 1시간 덕분에 오후도 버텨보자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오늘도 고민 말고, 매일매일 짧은 글, 31일 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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