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60부터

by 민정애

안개가 많이 끼겠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맑은 아침이다. 온 가족이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두 며느리가 몇 달 전부터 머리를 맞대고 가족여행을 준비했다. 남편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비행기에 앉아 남편의 얼굴을 보며 내가 말했다.


“아이고 언제 그렇게 나이를 드셨수?”

남편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인생은 60부터야.”

남편이 그렇게 대답해주니 다행이지만 나이 먹은 건 사실인 걸 어쩌랴.

남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결혼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회갑이라니,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던 단어 ‘회갑’이 어느새 남편의 앞이마까지 다가오면서 머리숱까지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앞이마는 훤하지만 적당한 주름에 나이에 맞는 자연스러운 얼굴이라고 자위했다. 차 한 잔 마시고 나니 제주도에 도착했다. 준비해 둔 렌터카를 타고 아침을 먹으러 생선 요리로 잘 알려진 식당에 가서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 두툼한 제주 은갈치 구이, 역시 제주도에서만 먹어볼 수 있다는 쥐치 졸임, 전복죽 등을 골고루 맛보았다.


표선에 있는 호텔에 체크 인 했다. 창문 가득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자연이 주는 평온함과 가족의 따뜻한 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우리를 방으로 들여보내며 며느리들이 마사지 예약 시간을 알려준다. 미리 예약해 놓은 것이니 사양 말란다. 이렇게 세심하게 시부모를 생각해 주는 며느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밀려온다.


예약 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수영을 하기로 했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할 수 있는 호텔의 시설이 마음에 들었다.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야외 수영장으로 나가 보았다. 수온이 따뜻해 춥지 않았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코끝으로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넓은 수영장에서 혼자 수영하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수영을 마치고 마사지 실로 향했다. 흰 가운을 입은 친절한 직원들이 구아버 차를 권하며 안내해 주었다. 남편과 같이 서양식 자쿠지에 들어가 20분간 몸을 이완시켰다. 서로 망가진 몸매로도 아무 스스럼없이 벌거벗고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신혼 때의 설렘이나 부끄러움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동안 참 뻔뻔해진 자신에게 그저 웃음이 나왔다. 남편 역시 불룩 나온 배를 그대로 내놓고 아무 스스럼이 없다. 그저 지금까지 서로 편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수밖에.


자쿠지에서 나와 마사지 침대에 나란히 누었다. 맛사지사의 부드러운 손길로 마사지를 받으니 두 아들 내외의 따뜻한 마음까지 온몸으로 스몄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에는 호텔 뷔페에서 온 가족이 담소하며 남편의 예순한 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두 아들 내외와 다섯 살 손자, 세 살 손녀, 작은 아들의 두 살짜리 손녀, 둘째 며느리 뱃속의 아기까지 모두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 캄캄한 창밖으로 보이는 등대의 깜박이는 불빛처럼 나의 인생의 등대가 되어주는 가족이 무척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이튿날 아침 호텔 방에서 수평선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찬란하게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보니 감사의 기도가 가슴 가득 채워진다. 아침 식사로는 서울에서 맛보기 어려운 성게 미역국과 오분작 뚝배기로 제주도의 맛을 뱃속 가득 채우고 성산 일출봉으로 향했다.


“해 뜨는 오름으로도 불리는 성산 일출봉은 약 5천 년 전에 얕은 수심의 해저에서 수성화산 분출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응회구이고 높이 180m로 제주도의 동쪽 해안에 거대한 고성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이 응회구는 사발 모양의 분화구를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해안 절벽을 따라 다양한 내부 구조를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일출봉의 과거 화산 활동은 물론 전 세계 수성화산의 분출과 퇴적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지질학적 가치가 있다.”라고 쓰여진 안내문을 보며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바람이 너무 불어 역시 제주에는 바람이 많다는 것만 실감하고 내려와야만 했다. 다음은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로 유명한 섭지코지로 향했다. 겨울 바닷바람을 안고 흔들리는 억새들, 그 밑으로 찬바람을 맞으면서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서도 아직 제 색깔을 잃지 않고 피어 있는 들꽃들이 무언으로 나에게 속삭인다. 생의 마지막까지 모두를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라고. 바람 소리의 반주에 맞추어 춤추는 억새들의 향연을 감상하며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착하니 바다 위로 높이 솟은 바위가 지난봄에 들렀던 호주 남단에 위치한 그레이트 오션의 12 사도 바위를 연상케 했다. 둘째 아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우리 부부를 세워 놓고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아이들도 먼 훗날 오늘을 아름다운 날로 기억하길 바라며 섭지코지를 떠났다. 점심으로는 역시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성게 국수와 갓 잡은 제철 생선으로 만든 회국수를 먹었다. 처음 먹어본 음식인데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이는 아주 감칠맛 나는 음식이었다.


점심을 먹고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것이 가까이 보이는 해안도로를 지나 한라산으로 향했다. 어린 손주들 때문에 등산이 어려워 드라이브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겨울 한라산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자연은 우리에게 항상 많은 가르침을 준다. 여름의 무성했던 잎을 모두 떨구고 차디찬 겨울바람을 서로 어깨를 기대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단단한 나이테를 하나씩 더하는 나무들처럼 우리 가족도 서로 보듬고 정을 쌓으며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드라이브 길에 정방폭포, 오’ 설록 티 뮤지엄에 들렀다. 25만 평의 광활한 서광다원 내에 자리한 티 뮤지엄에 들러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차에 대한 문화와 역사 상식 등을 체험하고 싶었는데 겨울철에는 5시에 폐관이 되어 6시인 줄 알고 간 우리는 겨울인데도 초록색 잎을 간직하고 있는 광활한 차밭만 바라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녁을 먹으러 횟집으로 갔다. 모둠회 두 접시에 따라 나온 밑반찬이 너무 많아 모두 만족한 식사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제주 여행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과 같이 아름다운 해변을 산책했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경이롭고 두렵고 아름답다. 어젯밤 거센 파도의 힘찬 소용돌이와 달리 오늘 아침은 고운 얼굴로 차분히 가라앉아 그저 제 힘만큼만 출렁인다. 이제 우리 부부에게도 거센 바람은 불어오지 않길 바라며 호텔로 돌아왔다. 아침을 먹고 서쪽 해안에 위치한 용두암을 둘러보았다. 용궁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오르려다 한라산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을 머금은 용두암은 정말 글자 그대로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자연의 신비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사진 몇 컷 찍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점심으로는 제주도에 오면 꼭 먹고 가야 한다는 활 전복 짬뽕을 추천하는 둘째 아들의 권유로 호텔 안에 있는 중국집에 들러 중국음식으로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회갑을 맞이한 남편, 그동안 힘든 연예계에서 한 길을 묵묵히 걸어온 남편에게 정말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제 남편의 회갑여행을 마무리하며 어제 한라산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되새겨 본다. 거대한 산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거센 눈보라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제 몸에 기대어 사는 모든 것들에게 언제까지나 넓은 가슴을 고스란히 내어주고 있다. 나무에게는 한 해 한 해 더욱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고 철 따라 수 만 송이의 꽃을 피우게 하며 수만 마리의 새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며 그저 그들이 제 색깔대로 마음 것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우리 부부도 한라산처럼 더욱 성숙하고 더욱 너그럽고 더욱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 언제라도 자식들의 푸근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의 뜰을 가꾸리라 다짐해 본다. 가족 모두가 지금처럼 서로를 아끼며 더욱더 사랑하며 살아가길 기도하며 끝으로 서로 우애 있게


잘 지내는 사랑스러운 두 며느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2011)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중한 가족, 소중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