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가족, 소중한 친구.

by 민정애

나이 들수록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끼리 하는 여행이 제일 재미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부정했었다. 남편하고 같이 가지 않는 여행은 생각도 안 해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좋은 곳에 혼자 여행하게 될 때면 남편과 같이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났었다. 부부란 항상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되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역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항상 나를 지켜주는 남편이 있고 믿음직스러운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가끔은 나만이 느끼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나는 이것을 영혼의 외로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남편은 요즈음 골프장을 즐겨 찾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투덜대곤 한다. 어쩌면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고. 나는 지금 외롭다고. 골프장 한 번 안 가고 같이 낙엽도 밟아보고 음악회라도 한 번 가 준다면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겠느냐고. 그러면 남편은 대답한다. 당신도 골프를 배우라고. 그러나 나는 안다. 아내하고 같이 하는 골프가 남편들에게 얼마나 재미없는지를, 언젠가 남편의 친구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가장 재미없는 골프가 아내 하고 같이 하는 골프라고. 역시 내 친구들도 어디를 가던 이제는 남편 하고 가는 것이 제일 재미없다고 입을 모은다. 나도 어느새 그들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서로 미워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같이 부대끼며 서로를 속속들이 너무 잘 알기 때문이 아닌가. 서로를 존중하고 믿는 마음만 있다면 각자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멋진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 역시 존중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자유를 누리게 하고 싶다. 그리고 나 또한 나만의 외로움을 음미하며 즐기고 싶다. 오늘도 역시 남편은 골프장에 갔다. 어떻게 나만의 외로움을 존중해줄까 생각하다 바이올린을 하는 친구와 얼마 전 알게 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영어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음악 감상실에 가자고 제안했다. 물론 둘 다 대찬성이었다. 일산에 있는 조그만 고전음악 감상실인데 토요일마다 정기 연주회가 열리는 곳이다. 피아니스트 정 자영이 베토벤 소나타 21번 G장조 작품 53 발트 시타인을 시작으로 리스트의 단테를 읽고, 슈벨트의 환상곡 방랑자를 차례로 연주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신 동헌 화백의 작품 해설이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거칠게 자라난 베토벤에게 사교성과 지혜와 그리고 귀족적인 품위를 길러준 것은 발트 시타인 백작의 힘이었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 때 그의 메모장에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얻기를’이라고 써서 베토벤을 격려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베토벤이 지울리 에타와의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서 그의 정열이 가장 불타오르던 시기에 작곡된 곡이 소나타 21번 C장조이다. 호쾌하고 웅장한 이 곡의 제목은 발트 시타인 인데 베토벤 자신이 명명한 것은 아니고 발트 시타인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말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열 손가락으로 베토벤의 젊음과 기백을 고스란히 표현해내는 그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심이 우러났다.


‘리스트의 단테를 읽고 란 곡은 빅토르 위고의 시집에 담은 ‘단테를 읽고’라는 시에서 얻은 것이며 리스트는 단테의 신곡의 제1부 지옥편에 그려진 비탄, 거만, 음란, 증오, 기아 등이 뒤섞여 있는 처절한 지옥상을 소리로 표현한다는 시도를 하였던 것 같다.’


두 번째 곡인 ‘리스트의 단테를 읽고’를 들으며 해설자의 해설에 의문이 생겼다. 지옥의 소리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마지막 곡인 슈벨트의 환상곡 ‘방랑자’를 들을 때는 부드러운 선율과 환상곡 풍의 화려함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가지 또 멋있었던 것은 해설을 맡은 노 화백이 연주를 들으며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모습을 스케치하여 연주가 끝난 다음 연주자에게 선물하는 모습이었다. 예술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간단한 다과를 하며 연주회 뒷이야기와 앙코르곡을 들으며 담소했다. 가까운 곳에 이런 장소가 있고 이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나는 근간에 몇 명의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영어를 조금 하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행복 중에 하나이다. 캐나다에 갈 때면 꼭 자기 집에서 자야 한다는 몇 명의 캐나다 친구가 있고 미국에 올 때면 꼭 만나고 가라는 미국인 친구가 있고 서울에서 가끔 만나는 인도인 친구도 있다. 얼마 전에는 캐나다 친구 가족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 집에서 머물렀었다. 오늘 같이 한 친구 중에 한 명은 몇 달 전에 알게 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영어강사이다. 일 년 전에 우리나라에 왔고 이름은 도날드 나이는 55세 결혼 경험이 없는 싱글이다. 자기 나라에서도 대학교수로 있었고 퇴직한 후에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며 삶의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4일은 일하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여행과 공연을 보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박물관은 물론 최남단 구석구석까지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고 예술의 전당 회원으로 가입하여 거의 모든 공연을 빠짐없이 보고 있다고 한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예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에 고개가 숙여진다. 외국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참 부자라는 생각을 한다. 공짜로 그들이 가진 문화를 누릴 수 있으니 부자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공연이 끝나고 담소하는 자리에서 해설을 맡았던 화백이 도날드의 모습을 스케치해 주었다. 도날드에게 멋진 추억이 될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도날드가 누리는 시간과 경제적인 자유와 문화적인 생활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 편으로는 그가 누리는 자유가 한없이 부럽지만 낯선 타향에서 저녁에 아무도 없는 불 꺼진 방으로 들어가는 그를 생각하면 남편과 아들이 있는 나의 작은 둥지가 얼마나 소중 한가 새삼 나의 가족에게 따스함을 느낀다. 친구, 인생을 살아가는데 양념과 같이 꼭 필요한 소중한 존재이지만 가족이 없이 친구만 있다면 주식은 없고 양념만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주는 나의 소중한 가족, 오늘은 골프장에서 돌아오며 미안해할 남편과 여자 친구 만나느라 늦게 귀가하는 아들에게 잔소리 대신 따뜻한 포옹으로 고마움을 표 해야겠다.(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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