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씨~ 그놈이 그 놈인데, 엑스레이 비용만 날렸네.’
병원을 나서며 나 혼자 하는 말이다. 나는 요즘 목디스크와 손가락 관절이 불편해 가끔 병원에 다닌다. 지난번에 다니던 정형외과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갈 때마다 의사의 무뚝뚝한 표정과 내가 묻는 말에 귀찮다는 듯 짧게 대답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치료받고 나올 때마다 개운치가 않다. 특히 나처럼 나이 들면서 생기는 퇴행성 질환은 치료 효과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꾸준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의사가 불친절하면 중도에 치료를 포기하게 된다.
그런 저런 이유로 얼마 동안 치료를 중단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손가락과 목이 또 불편하다. 원인은 내가 안다. 지난번 골다공증 검사 결과도 안 좋게 나왔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으니 자세에 신경 쓴다 해도 목에 무리가 된 것 같다. 거기다 나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거의 매일 피아노를 친다. 그런 것들이 쌓여 목도 경직되고 손가락에 퇴행성관절염이 왔을 것이다. 글쓰기와 책 읽기, 피아노 연주하기는 죽을 때까지 놓지 말아야지 다짐하는데 가끔 건강이 발목을 잡으면 괜스레 우울해진다. 오늘은 병원을 옮겨보기로 결정했다. 좀 더 친절한 의사와 만나기를 기도하며. 그러나 그전 의사와 별 다르지 않다.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진찰실로 들어갔는데 역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대한다. 나의 증상을 말하니 먼저 엑스레이를 찍으란다. 먼저 병원에서 찍은 지 얼마 안 되는데 병원을 옮기려니 또 찍어야 한다. 결과는 뻔한 건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자주 엑스레이에 내 몸을 노출시키는 것 또한 모르긴 해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병원에 왔으니 의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다행히 결과는 지난번 의사가 말한 것보다 심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노인성 질환이니 좋아지기를 기대하지 말란다. 물론 나도 안다 노인성 질환이라는 것. 그렇지만 말이라도 좀 희망적으로 해줄 수 없나? 기왕 일하는 거 좀 웃으며 환자를 대할 수 없나? 자기가 그동안 힘들게 공부해서 연마한 의술을 즐거운 마음으로 환자에게 베풀면 의사 자신도 좋고 환자들도 좋을 텐데.
얼마 전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TV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난다. 히포크라테스는 수사학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수사학’의 사전적 의미는 ‘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 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당신의 병은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설명해 주면 우리의 몸은 심리적 영향을 발아 자연치유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들에게 수사학을 강조했다고 한다.
법 의학자 이 호 교수도 TV에서 이렇게 말했다.
"一口, 二足, 三藥, 四技
첫째, 말로 환자를 어루만질 것.
둘째, 발로 부지런히 환자를 찾아갈 것.
그다음 약과 기술을 활용하라.
클리닉(CLINIC)의 어원은 기울어진 몸을 벽에 기대고 누워 있다는 뜻 이란다. 침대에 누운 환자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클리닉이란다. 아무리 의술이 좋다 해도 의사의 친절한 말 한마디가 곁들여지지 않는다면 좋은 의사가 못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사는 환자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당신의 병은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쓰여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의술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말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먼저인 의사를 만나고 싶은 것은 내 욕심일까?
‘70세가 노화의 갈림길’이라는 제목의 책 저자인 노인 전문 정신과 의사인 ‘오다 히데키’는 이렇게 조언한다.
“건강하게 오래 생존하는 데에 의사는 그다지 신뢰할 만한 존재는 아니다.
의사가 뭐라고 해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자. 과연 이 지시에 따라야 내가 오래 살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년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가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나름의 정보 수집이나 다른 의사의 진단을 듣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병원을 나서며 그동안 의사의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 몸은 의사보다 내가 잘 알 것이다. 내 마음 또한 의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내 병의 원인이 된 나의 마음자세, 식습관, 생활습관을 잘 살펴 살펴봐야겠다. 바쁜 의사한테 내 마음까지 알아 달라고, 친절한 태도로 나를 대하라고 억지 쓰지 말고 의학적인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 감사하자 마음먹으며 그동안 주인의 혹사에도 잘 견뎌준 내 몸의 기관마다에 감사 또 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