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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렸을 적에

by 민정애

코로나 이후 다시 복지관 수업이 시작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수업 중단으로 그동안 해오던 한국 무용을 중단한 지 3년 만이다. 다시 시작된 수업 시간, 그동안 배웠던 동작이 생각나지 않는다. 호흡과 같이 바른 자세로 해야 하는 한국 무용의 동작은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겨우겨우 따라 하며 한 시간 사십 분의 수업시간을 마쳤다. 그런데 저녁에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발바닥에 통증이 오면서 디딜 수 없이 아프다. 아픈 자리에 파스를 붙이고 누워 생각한다. 이게 나이 탓인가, 그동안 걷는 데는 자신이 있었는데 조금 무리했다고 이렇게 싸인이 오다니, 이제 더 이상 무용을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심란하다.


내가 한국무용을 취미로 하게 된 동기는 중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가 시골 국민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국민학교 때 참 어렵게 공부했다. 1.2 학년은 처음에 입학한 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초에 아버지가 시골학교로 전근이 되었다. 그때 중학교에 다니던 큰언니는 기숙사 자리 날 때까지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다가 기숙사로 들어갔고, 초등학교 5학년이던 작은 언니는 서울 큰집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작은 언니 역시 어린 나이에 큰엄마의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고생이 많았단다. 나는 다행히 초등학생이어서 부모님 떨어지지 않고 아버지 따라 시골학교에 다녔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나중에 알았다. 그 당시에는 대처로 유학 간 언니들이 부러웠다. 언니들은 그때 친척집에서 받았던 설움이 평생 트라우마가 되었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어렸을 때는 부모와 같이 살아야 된다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그럼 나는 어땠는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학교로 전학 갔는데 4학년 초에 또 아버지 따라 더 시골 학교로 전학 갔다. 그때는 교사도 1년에 한 번씩 전근을 다녔다. 5학년 때 처음 입학했던 학교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 그 학교는 대전의 변두리에 있는 학교였다. 그 당시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때라 변두리 학교에서는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가 나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나를 대전 시내에 있는 큰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 학교는 명문 중학교에 많이 입학시키기로 정평이 나있는 학교였다. 한 학년에 한 학급씩 밖에 없던 시골 학교에서 갑자기 도시에 있는 큰 학교로 전학을 왔으니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왕따 당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때 아이들은 순진했었나 보다.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기에 일찍 일어나야 되고 공부도 시골학교보다 몇 배 어려웠다. 시골학교 다닐 때는 선두에 있던 내가 그 학교에서는 거의 꼴찌 그룹이었다. 매일 시험을 치르는데 한 개 틀리는데 손바닥 한 대씩 맞았다. 거의 매일 손바닥 20대 이상씩 맞아 얼얼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몇 달을 다녀서 성적을 중간정도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다 보니 6학년 때 나의 체중이 25킬로그램이었고 매일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본 아버지가 좋은 중학교 보내려다 아이 죽이겠다며 다시 시골학교로 돌아오게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6년 동안 여섯 번 전학을 다녔다. 다행히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나는 우등생이 되었고, 원하던 중학교에 합격했다. 그렇게 들어간 중학교는 사립학교로 집안이 좋은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 피아노, 무용, 성악을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 특기 장학생으로 들어온 아이들이 있었다. 시골학교를 전전하다 겨우 들어온 나는 그런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학교 행사 때 무대에서 실력을 뽐내는 아이들을 보면 괜히 주눅이 들고 부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우리 집안 형편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었나 보다. 무대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치고 화려한 무용복을 입고 춤을 추는 아이들은 다른 세상에서 온 천사들 같았으니까.


내가 70이 넘은 지금까지도 피아노를 치고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무용을 하는 것이 그때의 결핍을 보상해 주려는 심리일 것이다. 늦게 시작한 피아노는 갈수록 재미있으니 계속하고 싶고, 무용도 열심히 해서 중학교 때 아무에게 말 못 하고 속으로 삭였던 어린 나를 위로해주고 싶다.

문제는 건강이다. 피아노를 열심히 친 탓인지 손가락에 관절염이 왔고 무용을 하고 나면 발바닥과 고관절이 아프다. 지금 나의 손가락과 발바닥에는 파스가 붙어있지만 아직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렸을 때의 내가 그만해도 좋다 할 때까지 해야 하는데 아직은 아니다.


내 삶을 뒤돌아보면 어려움도 많았지만 잘 견뎌온 힘은 초등학교 때 여섯 번 전학 다니며 그때마다 적응하며 살아냈던 저력이 아닐까 한다. 또 어려운 와중에도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은 것은 나만의 오티움(내 영혼에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뜻하는 라틴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 예술이 없다면 삭막할 것이다. 예술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힘들 때 한 편의 시로 위로받고, 음악을 듣고 노래 부르며 행복을 느끼고, 글을 쓰며 성찰할 수 있으니 예술이야말로 우리가 죽는 날까지 지향해야 할 덕목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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