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사항
지금부터 약 15년 전 나는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다.
수술 시간이 예상보다 길게 걸린(13시간) 꽤 위험한 수술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옮겨져 있는 나에게 간호사가 다가와 내가 의식이 회복되었는지 확인했다.
의식 저편에서 간호사의 말이 들린다.
‘환자님, 이름이 뭐예요?’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나의 대답은 ‘나 유학 가야 되는데.’였다.
다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름이 뭐예요?’
‘민 정애’ 그렇게 나는 다시 의식을 찾았다.
나는 왜 그 무의식 순간에 ‘나 유학 가야 되는데’라는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캐나다에서 유학할 때 나도 영어 연수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석했었다. 그때마다 아이들 공부 끝나면 나도 외국에서 정식으로 공부할 기회를 꼭 가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정주부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 공부가 끝나니 두 아들 연거푸 결혼할 때가 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시부모님이 계신 맏며느리이고, 아내가 없는 남편은 자기 관리가 안 될 것 같고, 또 그렇다고 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핑계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수술 후 의식이 회복되는 순간 뜬금없이 나온 말이 ‘나 유학 가야 되는데’였으니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포기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도 가끔 그 꿈이 꿈틀거리는 것은 보면 아직도 진행 중인가 보다.
그럴 때마다 ‘그래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 아이들도 자기 갈 길 잘 가고 있고, 남편도 건강하고, 외국여행도 그만큼 했으면 됐고, 혼자 이것저것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 하고 자위해 보지만 그래도 마지막 버킷리스트가 한 가지 있다면 그때 간절했던 외국학교의 캠퍼스의 낭만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6월에 미국에 사는 아들네 집에 갈 예정이다.
남편과 함께 한 달 정도 머물 예정인데 남편은 한 달도 길다고 빨리 오자고 한다. 나는 며느리에게 부탁해서 한 달은 너희 집에서 있고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 3개월 정도 홈스테이 하면서 랭귀지스쿨에 다니고 싶으니 학교와 홈스테이 할 집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어머니, 여기는 어머니가 경험한 캐나다하고는 달라요, 어머니 연세도 있고 위험해서 안 돼요,’라며 단박에 거절을 한다.
물론 건강 문제도 있고 치안 문제도 있으니 반대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엄마도 너희들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꿈이 있었다는 거라도 알아주면 좋겠다.
전화를 끊고 씁쓸한 마음에 영어 연수 갔을 때 알게 된 밴쿠버에 사는 캐나다인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나의 마음을 전했더니 자기 집에서 홈스테이 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꼭 오라고 반갑게 말해준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용기 내볼까 생각 중이다.
<<아름다운 저녁 단풍잎이 고운 밴쿠버의 캠퍼스 도서관에서 내가 나온다. 멋진 코트 깃을 올리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외우며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다.
Auguries of Innocence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순수의 전조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에서 무한을 쥐고,
순간 속에서도 영원을 보라
그때 저쪽에서 철학 교수님이 다가온다.
평상시 내가 존경하는 멋진 남자다. 그는 내가 늦은 나이에 유학 와 고생한다며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우리는 낙엽 떨어지는 벤치에 앉아 아름다운 계절을 공유한다. 나는 그의 살아온 이야기, 그의 철학, 그의 가치관을 들으며 그에게 빠져든다. 나도 그에게 나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기로 한다. 물론 이 모든 대화는 영어로 한다. 그가 내 손을 슬쩍 잡는다. 순간 전신에 찌릿한 전기가 흐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나 아직도 매력 있는 여잔가 봐, 멋진 외국 남자가 손잡고 놀자고 했어’ 그러면 남편은 ‘착각은 자유’라고 놀리겠지.>>
이상은(<< >>부분) 나의 희망사항이다. 내 나이 70이니 이런 꿈이 있다고 말하면 모두 웃긴다고, 꿈 깨라고, 주제를 알라고 하겠지만 아직은 이 꿈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