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내 나이

by 민정애

얼마 전 ‘학문과 인생의 정점에 선 일흔둘 노학자의 뜨거운 사랑’ 이란 부제가 붙은 다큐인사이드가 방영되었다. TV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눈을 뗄 수 없었다. ‘여백 서원’ 이란 이름의 조용한 서원을 가꾸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전 영애)가 소개되었다. ‘놀기엔 너무 늙었고 꿈을 포기하기엔 너무 젊었다’는 파우스트의 말에 공감해 조용한 산골에 서원을 만들고 가꾸어 후학들이 언제라도 편히 공부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낮에는 서원을 손수 가꾸고 밤에는 연구하고 집필하며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모습이 방영됐다. 넓은 뜰엔 꽃들이 넘쳐 나고 그 꽃과 나무들이 전해주는 떨림에 가슴 벅차오른단다. 뭔가를 보고 마음이 벅차오르고 떨리는 것이 없으면 인생을 다 산 것이라고 말한다. 평생을 독일 문학, 특히 괴테연구를 한 분이다. 파우스트를 1974년부터 40년간 읽고 5년에 걸쳐 번역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객원연구원이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괴테 금메달 수상했다.


방송이 끝나고도 한참 여운이 남았다. 그냥 그분을 만나고 싶어졌다. 기회가 된다면 만나서 인간 파우스트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고 싶다.

대문호 괴테가 60년에 걸쳐 쓴 파우스트의 장대한 서사, 소설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희곡 같기도 한, 그러나 엄연한 시(운문)이지 않은가.

세계적 괴테 연구자이자 시인인 전 영애 교수가

시(詩) 답게 제대로 옮긴 12,111행의 정교한 문장들을

한 번쯤은 읽어야지 하고 몇 번을 뒤적여 봤지만 번번이 완독 하지 못했다.


지난 토요일 남편과 여백 서원을 방문했다. 무작정 방문했는데 교수님께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겨울이라 TV에서 보았던 예쁜 꽃들과 푸른 잎은 없었지만 대신 방안에는 책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는 1854년에 출간된 파우스트 원본도 있었고 40년 동안 읽어서 너덜너덜 해진 손때 묻은 책도 있었다. 그 책을 보는 순간 그동안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파우스트를 연구했는지 존경심이 우러났다. ‘데미안’ ‘변신 시골의사’ 파우스트 전집‘ 등 60여 권을 번역했으며 괴테 연구서는 물론 최근 출간한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등 본인의 저서도 많았다.


한 달에 두 번 일반인들이 모여 파우스트를 같이 읽고 공부한다고 한다. 마침 그날이 두 번째 날이었는데 첫째 날 못 온 사람들을 위해 다시 한번 파우스트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철학과 법학과 의학, 거기에 신학까지 모두 깊이 연구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만 깨달았다. 모든 것을 섭렵 했지만 사랑이 빠져 있고 즐거워할 줄 몰랐던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의 흥미로운 계약을 한다.

파우스트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고 한다. 방황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지향이 있는 한 그 방황은 갈 곳이 있다는 뜻이란다. 이 깊은 뜻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봐야겠다.

독일에서 파우스트를 원본 그대로 21시간 동안 마라톤 공연을 관람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 공연을 보러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독일까지 갔다고 한다. 그분이 신나게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지금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옛날처럼 정보가 공유되지 않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서울대 교수 (세계적인 석학)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을까, 서울대 못 들어간 걸 한탄할 필요 없다. 그뿐인가 마음만 있다면 하버드 강의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거기에 젊었을 때 깨닫지 못했던 지혜도 나이로 이해가 되니 내 나이 많다고 주눅 들 필요도 없다. 나는 지금의 내 나이가 좋다. 아이들 키울 걱정, 돈 벌 걱정, 남에게 잘 보이려는 치장, 등 모두 필요 없는 내 나이가 좋다. 그저 사랑만 주고 싶은 내 나이가 좋다. 나는 남들이 한다는 노후 걱정은 안 하기로 한다. 노후대책을 공부로 정했으니 모르는 것을 배우다 더 이상 호기심이 없어지고 배울 힘이 없으면 조용히 다른 별로 돌아가길 바랄 뿐이다.

오늘도 배운 것, 또 배울 것이 많아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keyword
이전 12화난 아직 매력 있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