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티드 베일
용서와 화해는 늦기 전에
주말의 명화 시간에 ‘페인티드 베일’ 이란 타이틀의 영화를 봤다.
서머셋 모옴의 원작 ‘인생의 베일’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존 커렌 감독, 키티(나오미 왓츠), 월터(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영화다.
소설과는 약간 다르게 각색되었지만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할 수 있는 영화였다.
의사이자 세균학자 월터는 발랄한 아가씨 키티에게 첫눈에 반한다.
미성숙한 키티는 허영심 많은 엄마에게 떠밀려 아직 월터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결혼을 감행한다.
결혼과 동시에 중국의 상하이(소설에서는 홍콩)로 이주하게 되는데 차갑고 냉철한 성격의 월터는 자기의 방식으로 키티를 사랑하지만 가슴 뛰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예쁘고 명랑한 키티는 만족하지 못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둘 사이는 벽이 생기고 자기애에 갇힌 월터는 키티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친구도 없는 타국에서 따분한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낄 무렵 남편이 데려간 파티에서 외교관인 다정하고 외모가 출중한 유부남 찰스를 만나 불륜에 빠지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월터는 키티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오르지만 특유의 냉철함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안고 연구를 핑계로 콜레라가 만연 중인 산간벽지로 자원하게 된다. 키티는 찰스를 믿고 월터를 따라가지 않겠다며 이혼을 요구한다. 월터는 찰스가 키티를 받아주면 이혼해주겠다고 한다. 월터는 찰스가 키티를 받아주지 않을 사람이란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키티는 찰스가 분명 자기를 받아줄 거라는 확신을 한다. 찰스에게 희망을 걸고 달려간 키티에게 찰스는 자기 가정을 버릴 수 없다고 키티를 거절한다. 선택지가 없는 키티는 월터를 따라가기로 한다.
이때부터 키티의 불행이 시작된다.
그 시대의 여성들은 성공한 남자 그늘에 사는 것이 행복의 전부였다. 키티는 순간의 욕망으로 사랑을 탐닉하는 순간 미래를 잃어버리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월터 역시 천부적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키티에게 더욱 냉소적으로 대하는 것은 물론 그런 아내를 사랑했던 자신을 경멸하며 내적 괴로움으로 침잠한다.
월터가 내적 괴로움에 함몰돼 있는 동안
키티는 콜레라 창궐지역의 열악한 환경에서 헌신하는 프랑스 수녀들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속된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매일 수많은 콜레라 환자들의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남편 월터에게도 존경심을 갖게 된다.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려는 순간 월터가 콜레라에 걸려 죽고 만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달려간 키티에게 마지막 한 말이 ‘용서해 줘’였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용서와 화해도 타이밍, 늦기 전에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연애 소설의 본질은 행복한 결말이 아닌 배신과 파국에 있다지만 그들의 사랑이 너무 안타까웠다. 왜 진작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했을까, 물론 영화지만 아쉬움에 여운이 남는다. 나도 인간관계에서 아직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소설에서 키티는 월터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도 친구로서 지낼 수 없겠느냐고 용서를 빌지만 월터는 그마저 거부한다. 콜레라 환자들에게 한없는 동정과 희생을 보이면서도 한때 사랑했던 여인에게 인간적 연민조차 품지 못하는 월터는 강렬한 파고를 겪고도 변하지 않는다. 반면 월터가 그토록 경멸한 키티는 절망적 시간 속에서 수녀들과 같이 고아들을 돌보며 자신이 경박하고 속된 인간이었음을 인지하고 성장해 나간다. 그 후 키티는 용서라는 실마리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영화에서 월터는 키티에게 용서해 달라고 했지만 소설에서는 월터가 죽어가며 ‘죽은 건 개였다’고 허공에 대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18세기 영국의 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가 지은 `미친개의 죽음에 관한 애가'라는 시에서 나온 이야기다.
한 착한 남자가 잡종개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그 개가 남자를 물자 사람들은 미친개에 물린 남자가 죽을 것이라고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죽은 건 개였다는 내용이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자 했지만 정작 죽은 건 월터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