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의 루틴인 피아노 연주를 위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악보를 펼치고 건반에 손이 닿는 순간 감사와 행복이 내 마음을 감싼다. 언제나 피아노 치는 시간은 나에게 축복이 쏟아지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늘 그 축복 속에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 지금부터 60년 전쯤의 일이지만 또렷한 기억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에는 자기 몸집보다 더 큰 배터리를 등에 업고 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었다. 그 라디오가 처음 우리 집에 온 날 나는 조그만 트랜지스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이 조그만 상자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가서 말을 하고 노래를 하는지 신기해했다. 온 식구가 즐겨 듣던 프로그램은 '재치문답'이었고 내가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국민학생의 노래 경연프로인 '누가 누가 잘하나'였다. 그 프로를 계속 듣다 보니 나도 그 경연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방송이 끝날 때쯤 참가하는 방법에 대해 사회자가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걸 잘 기억했다가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다. 그 일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나 혼자 계획했다.
그때 우리 집은 대전시의 변두리였고 방송국은 시내에 있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시골 아이가 혼자 찾아가겠다는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돈 10원을 들고 길을 나섰다. 집에서 한참 걸어 나가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국민학생 버스비는 4원이었으니 왕복차비하고도 2원이 남는다. 안심이다. 차장에게 받은 거스름돈 6원을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방속국 가려고 하는데 내리는 정류장을 알려달라고 차장 언니에게 부탁했다. 드디어 버스에서 내렸다. 대전시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어쨌든 물어물어 방송국에 도착했다. 공개홀에는 이미 많은 아이들이 도착해 있었다. 하나같이 예쁘게 차려입었다. 그러나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노래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합창단이고 음악시간이면 선생님께 항상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지금처럼 신청을 받고 예선을 치르는 방법이 아닌 그 자리에서 '저요 저요' 손을 들면 사회자 마음대로 지정하는 방식이었다. 공개홀에 꽉 찬 아이들이 모두 손을 드는데 사회자의 눈에 띄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시간 내내 손을 번쩍 들고 '저요 저요'만 외치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어린 나, 70이 넘은 내가 오늘 피아노 앞에 앉아 두 팔 벌려 그때의 나를 껴안으며 속삭인다. '너 그때 참 용감했구나, 사랑스럽다'
그때 부모님이 나의 재능을 알아주었다면, 나의 인생 여정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혹시 세계적인 성악가? 아니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하지만 그 생각은 그저 미소로 끝나는 여운이 된다. 결국,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오늘의 나로 만들었고, 음악이란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이제 나는 혼자서 연주하는 순간들을 사랑한다. 음악은 내 인생의 작은 반란이자,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길을 걸어왔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할 수 있는 피아노가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어쩌면, 부모님이 내 음악적 재능을 알아주지 않았던 덕분에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아직 어린 시절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꿈은 여전히 내 손가락 끝에서 맴돌며, 내 인생의 멜로디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피아노를 친다.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지금은 아주 소박하게 지역의 여성합창단원이고, 안방에서 혼자 내 피아노 소리가 흡족해 매일 행복해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다. 혼자서 연주하는 그 순간들은, 어린 시절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듯한 행복을 안겨준다. 음악은 내 인생의 친구이자, 내 영혼을 채우는 중요한 부분이다.
요즘은 클래식을 들으며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 각 음표마다 담긴 작곡가의 감정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음악이 주는 깊은 울림을 느낀다. 나의 음악 사랑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음악은 나에게 끝없는 영감을 주고, 삶의 고비마다 힘이 되어 준다. 앞으로도 음악과 함께하는 매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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